본문 바로가기

信仰人의 삶

변할 수 없는 것, 변할 수 있는 것, 변해야 하는 것

변할 수 없는 것, 변할 수 있는 것, 변해야 하는 것

요즘 사회에서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혁신’인 것 같다. 특히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거의 항상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제 우리는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될 것만 같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와중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이 2000년 전 팔레스티나의 작은 마을에서 30여 년을 살다가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신 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은 계속해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일까? 게다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8) 신앙을 순수하고 온전하게 지키는 일은 교회사에서 매우 엄격하게 수행되었다. 2000년 동안 열렸던 수많은 지역 공의회와 21번의 보편 공의회가 그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에는 분명히 변할 수 없는, 아니 변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구원의 진리와 신앙, 성사들, 그리고 교회의 구조인 교계제도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마치 박물관과 같아 이 불변의 진리들을 금고에 넣은 채 처음처럼 이대로 다음 세대에 넘겨주면 되는 걸까?

이 질문은 19세와 20세기에 많은 신학자가 던졌고, 결정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공의회 개막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다. “신앙의 순종을 드려야 하는 분명하고 불가변적 교리들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방법 안에서 연구되어야 하고 또 제시되어야 합니다. 사실, 신앙의 유산, 즉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가르침 안에 포함된 진리들과 그 진리들을 표현하는 방식은 별개의 것입니다.” 이 말씀이 20세기에 열린 이 공의회의 슬로건인 ‘아죠르나멘토’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변화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일단 단순하다. 교회가 하느님의 것인 동시에 인간들의 공동체이며 인간 역사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주지만, 세상 또한 교회에, 곧 신자들과 교회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중에는 유익한 것도, 해로운 것도 있다. 식별을 통한 수용과 정화가 필요한 것이다.

변화의 또 다른 동기는 교회의 사명이다. 우리는 전해 받은 신앙을 고백하고 살고 전파해야 하는데,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은 역사 안에 있기 때문에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식도, 삶의 방식도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 안에서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복음이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이 ‘맛나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삶의 자리에 부합하는 ‘방법’을 늘 모색해야 한다.

같은 시대에 살더라도 대상에 따라 교육 방법을 달리해야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진리는 변할 수 없는 것에 속하지만, 진리를 살아가는 방식, 표현하는 방식은 ‘변화할 수 있는 것’에 속한다. 그리고 이전의 방식이 더 이상 진리를 살고 전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면 그것은 이제 ‘변화되어야 하는’ 것에 속한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물체와 유사하다. 생물의 세포는 자신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테두리’를 가졌는데, 그 테두리 곧 세포막은 폐쇄적이지 않아서 건강한 ‘들고 남’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생물은 성장할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하여 역사 속에 걸어가는 교회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 변화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변화해야 하는 것을 식별해야 한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한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식별에는 목자와 하나 된 하느님 백성 전체가 참여한다.

- 가톨릭평화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