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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길동무 얘기

< 소통의 샘물 >

 

< 소통의 샘물 >

타인의 속은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

천 길보다 깊은 우물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서로 속을 가늠할 수 없는 타인들이

어떻게 집단으로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疏通)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은 집단이 공존할 수 있는 필수요건이다.

요즘 SNS 사회에서는

소통의 양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정보와 의견을 자주 많이 주고받으면

소통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

팔로워를 많이 거느린 유튜버가

소통의 대가인 양 행세한다.

하지만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양보다 질이다.

소통의 핵심은

통(通)이 아니라 소(疏)이다.

통(通)은 의견이나

사물의 왕래를 가리킨다.

내 의견이나 말이

상대에게 빈번하게 오간다고

좋은 소통이 될 순 없다.

정치권에서 여야 공방을 벌일 때

말이 빠르게 오가지만

소통이 잘 된다고 부르지 않는 이유이다.

소(疏)는 ‘트인다’는 의미이다.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소’이다.

내 마음이 열려 있어야

그것이 상대에게 전달되고

상대의 말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이런 원리를 깨우친 분이었다.

그는 조정대신, 부하, 친지들과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

소통의 도구는 장계, 서간, 시문이었다.

장군은 편지의 말미에 통상적으로 쓰는

배(拜)나 배상(拜上)을 쓰지 않고

‘이순신 소(疏)’라고 적었다.

소통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나는 커뮤니케이션이나 갈등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분들이

자기 집단 내에서 갈등을 부추기거나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를 더러 보았다.

설혹 그가 수백 개의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소통의 문맹자이다.

마음의 문이

단단히 닫힌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천 길 마음속의 우물을

상대에게 여는 것이고,

소통 행위는 그 샘물을 길어

상대에게 (소통의) 갈증을 풀어주는 일이다.

샘물의 성분은

아마 존중 30%, 공감 20%, 배려 10%,

이해 10% 등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결핍된 물이라면

이미 샘물이 아니다.

영혼을 혼탁하게 만드는 오수일 뿐이다.​

- 배연국의 행복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