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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김수환 추기경

<희망의 정의>

<희망의 정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이 희망입니다.

미래에 대한 바람도 희망입니다.

미래의 것보다 더 좋은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큰 것,

더 완전한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현재에서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미래의 것은

비록 분명치 않다 하더라도

충분히 믿을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충족된다는

확신 위에서만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은 믿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희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보람 있게 살 때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참으로 보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평생에 며칠이 될까 말까 하지만

그런 날마저도 "그날은 100% 보람되었는가?" 하고

자문한다면 그렇지는 못했다고

우리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99% 보람되었다 해도

나머지 1%가 충족되지 못했다면

결국 하루도 완전한 의미로 보람 있게

살 수 있었던 날이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미 이룩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아직 참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나'는

아직 있어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참된 '나'는 아직도 희망의 '나'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미래에 대한 꿈과 향수,

바람을 지니고 삽니다.

이 같은 미래에 대한 동경 혹은 그리움은

인간의 실존 상태를 가장 잘 말해줍니다.

오늘날처럼 인간이

'나' 의식을 느껴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오늘날처럼 '나'의 비참, '나'의 고독,

'나'의 불완전, '나'의 굶주림, '나'의 헐벗음을

느껴 본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오늘의 인간은 '나' 아닌 무엇,

나를 위한 '남(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고독의 심저에서 '나'를 위한

'너'를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름을 간절히, 간절히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내 소리의 메아리뿐입니다.

'너'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방랑의 길을 떠나 봅니다.

유흥가를 헤매고 아우성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찾는 '너'는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너'를 발견치 못하는 참된 이유는

'너'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