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와 전체의 평형>
구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 홀로서 살고 있다. 또한 남들과 더불어서 살
고 있다. 인문적 개념을 빌리면 인간에게는 단독자인 면과 연대자인
면 두 가지를 함께 지니고 있고, 이것을 사회과학적 숙어로는 인간
은 개체와 전체의 삶을 아울러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인간의 홀로서의 면부터 살펴보자. 흔히들 인류는 한 가족
이요, 겨레는 한 핏줄이요, 한 이웃, 한 형제, 심지어 부부는 한 모
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 인류세계는 국경을 만들어놓고 서로 갈라져 있으며,
한 겨레도 이념이나 종교로 서로 대치하고 한 이웃도 이해의 상충으
로 반목하기가 일쑤요, 형제자매나 부모와 자녀 사이도 하잘것없고,
한 몸이라는 부부도 결국은 남이더라는 냉엄한 현실과 냉혹한 체험
을 우리는 보고 알고 맛보고 있다.
좀더 이를 또렷이 인식하기 위하여 예를 하나 들면, 전북 고창읍
에 여고 2년생인 한 소녀가 옛 성터에 올라갔다가 그만 추락하여 전
신불수 상태가 되어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엎드려서 7,8년을 지내
는데, 그녀는 자신의 절박한 고통과 그 심정을 시로써 나타냈다는
이야기로 독자들도 아마 《산골처녀 옥진이》라는 그 시집 광고만은
보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시집의 감동적 독후감을 꺼내려는 것이 아니라 이 소녀
의 목숨을 부지시키고 있는 그 어머니의 헌신적 시중과 간병말인데
그런 어머니도 저 딸의 육신적 고통이나 정신적 비애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기를 바란다.
저렇듯 인간은 남으로서는 대체할 수 없는 면이 있어 그 장벽은
뚫을 수가 없고, 그 수렁은 건널 수가 없고, 그 거리는 헤아릴 수가
없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 어버이와 자식 사이, 아니 한 몸이라
는 부부 사이라도 이 인간 자체에서 오는 단절감은 결코 메울 수가
없다.
인간은 오직 이것을 삶의 여건으로 명백히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전후 프랑스의 혜성이었던 여류철학자 시몬느 베이유
는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와 상대방과의 그 간격을 받아들
이는 더없이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갈파한다.
흔히 사랑이라는 것을 상대방과의 완전일치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
지만, 만일 두 인간이 완전일치를 이룬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 편의
개성이나 인격의 말살을 의미한다 하겠다.
그런데 저렇듯 인간은 홀로서이면서 또 한편 더불어서 살아야 한
다. 이것도 이해하기 쉽게 우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가장 긴요한
의식주에다 예를 들면 내 옷, 내 밥, 내 집하고 모두들 자기 스스로
가 마련하고 제 힘이나 그 노력으로 해결한 듯 입고 먹고 살고들
있지만, 실상은 전혀 의식지 않은 생판 남들의 헤아릴 수 없는 노력
과 그 협동과 정성의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가령 내 옷 하지만 그 옷이 나에게 입혀지기까지는 원료의 수집,
섬유의 직조, 원단의 재단과 재봉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되며 그렇게
해서 마련된 옷을 자기가 사입게 된데, 자기가 그것을 사입은 돈
이라는 것도 그저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려서 나오는 게 아니다.
즉 나의 경우 대학의 봉급으로 사입었다면 그 대학이라는 것도 교수만
으로, 또는 건물만으로, 학생만으로 이뤄지는것이 아니라 그 학교
창설로부터의 역사는 물론이려니와 이제까지의 졸업생과 모든 학부
형들까지의 협동이 바로 내가 옷을 사입은 그 돈과 관련을 갖고 있
는 것이다.
이렇듯 밥이나 집, 아니 우리의 삶 자체가 무한량한 남의 노고와 정성과
그 협동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또 한편 남과
의 유대 없이는 삶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더러는 "세상 다
쓸데없더라. 나는 나만을 위해 살아야지."라거나 "나는 나라는 것을
다 버렸다. 오직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산다."고 큰소리를 치
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인간존재가 지니는저 여건의 양
면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오는 흰소리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홀로 서도 잘살 줄 알아야 하고 또한 남과 더불
어서도 잘살 줄알아야 하며, 특히 이 두 면의 평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이 평형이 유지되지 않고서는 그것이 개인적인 삶이거나 집단
적인 삶이거나 파탄을 가져온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인류의 생각의 흐름, 즉 사조(思潮)라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그 어느 한쪽만이 강조되어 균형을 잃어온 경향이 있
다. 다 알다시피 이제까지의 사상이나 이념이라는 것들이 인간의 개
체적인 면만에 치우치는가 하면, 또 전체적인 면만에 치우쳐서 나아
가서는 이것이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의 사상이나 그 체
제라는 것들이 바로 그것으로서 우리는 그것들이 지니는 모순과 대
립을 어느 누구보다도 체험하고 또 현재도 그 모진 고통 속에 있다.
저러한 인간존재에 대한 일면적인 사고는 시회사상뿐 아니라 인문사
상에도 양립되어 있어 저 실존주의 문예사상 같은 것은 인간의 단독
자적인 면만에 희망을 걸고, 또 소위 구조주의 주창자들은 인간의
행위를 전체 기능의 하나로만 보려고 들어서 인간의 고절(孤絶)의
심연에 눈먼 느낌을 준다.
오늘날 다행히도 인간의 더불어서의 면만을 강조해 오던, 즉 "인
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개인적인 면은 억제되어야 한
다."는 극단적 사상이나 그 체제가 붕괴되어 가고 있음은 다 아는
바다.
또한 그 반대로 개인주의나 자본주의가 지니는 불균형과 모순,
그리고 그 사회가 지니는 윤리적 타락과 문란과 패덕의 노출현상을
우리 또한 아는 바다.
그래서 우리가 저러한 사상적 이념적 모순과 그 병폐현상에서 벗
어나고 통일을 이루고 세계의 새로운 질서에 기여하려면, 먼저 저러
한 인간의 본질적 여건에 대한 명확한 자기 인식에서 출발하여 개체
적인 삶과 전체적인 삶의 균형이 중화를 이루는 자생철학(自生哲學)
이 각 부문에서 창출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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