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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

사랑하는 자녀에게 물려줄 하나의 자세를 추천하라면

휴심정 벗님글방

사랑하는 자녀에게 물려줄 하나의 자세를 추천하라면

픽사베이

씨앗

씨앗은 신비롭다. 봐도 봐도 신비롭다. 그 작은 크기 어디에 그토록 위대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제 품은 뜻을 펼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지켜주던, 그러나 때가 되었을 때는 억압이 되는 껍질을 저 스스로 찢으며 싹트는 씨앗은 신비롭다.

무르익을 때까지는 자신을 품어준,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든 극복해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그 무거운 땅을 뒤이어 힘차게 밀어 올리는 씨앗은 참으로 신비롭다.

저 높고 먼 곳으로부터 달려와 토양입자들 틈으로 투과되며 손짓하는 햇빛의 어둑하고 은밀한 부름에 화답하기 위해 주저 없이 땅을 헤집고 일어서는 씨앗은 신비롭다.

땅속 공극(空隙) 사이로 가만가만 흐르는 물과 습기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따르기 위해 땅을 비집고 뚫고 나아가는 씨앗은 놀랍고 신비롭고 위대하다. 보라! 까마득하게 신비로운 존재 씨앗. 그 쪼끄만 녀석 속에는 장차 그가 펼쳐나갈 장엄한 미래가 이미 다 고스란히 접혀 있지 않은가!

오동나무. 사진 김용규 제공

숲, 그리고 서식지

약간의 시적 방식과 운율을 써서 숲을 이렇게 정의해 보자. ‘숲은 신성한 씨앗(알)들이 껍질 벗고 일어나 자신과 자신 아닌 존재들 사이에 얽히고설키며 빚어내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세계’이다. 숲을 이렇게 정의해 놓고 보면 씨앗은 궁극적으로 숲의 공동 창조자이자 그 일원이다. 우리 역시 탓할 누구도 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공동 창조자이자 일원인 것처럼 말이다.

잠시 당신 스스로 씨앗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진짜 씨앗은 제 발로 걸어가 자신이 싹트고 살아갈 서식지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라는 특별한 씨앗에게는 서식지를 선택할 특권이 부여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씨앗은 싹트게 되어 있고, 때가 되면 씨앗은 싹트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때가 된 당신도 싹트고 싶다. 어느 땅을 선택해서 싹틔우고 살고 싶은가? 선택을 돕기 위한 짧은 보기가 있다. 직관적으로 선택해 보라. ①양분이 넉넉한 땅 ②햇살이 가득 비추는 땅 ③적당한 양분이 있고 적당하게 햇살이 드는 땅.

어느 땅을 고르셨는가? ①을 골랐다면 이미 양분으로 가득한 토양이니 소위 부잣집에 태어나는 씨앗인 셈이다. 하지만 숲에서 양분이 많은 땅이라면 그곳은 일반적으로 그늘진 땅이다. 그 양분은 나보다 먼저 들어온 생명들이 죽고 살면서 이루어낸 업적이다. 앞서 산 풀과 나무들의 이파리, 나뭇가지, 숱하게 오간 들짐승과 날짐승, 온갖 곤충들, 그리고 미생물… 그들이 이루어낸 성취와 상실이 유기물로 쌓여 넉넉한 양분이 되었다.

그래서 그곳은 그늘진 땅이다. 당신보다 먼저 뿌리내리고 하늘 빈자리를 향해 서로 다투고 그 속에서 조화를 찾으며 뻗어가고 있는 식물들이 보이는가? 먼저 사는 그들이 드리우는 그늘 때문에 당신에게로 도착하는 빛은 제한된 공간이다. 그런 까닭에 비옥한 땅을 골라 태어난 당신이 풀어야 할 삶의 숙제는 빛이다.

당신이 ②를 골랐다면 ①과 반대되는 조건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빛은 넉넉하여 좋을 것이다. 상층부의 간섭이 덜하니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빛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상대적으로 양분은 덜할 것이다. 가난과 검약이 숙명인 자리를 택했기 때문이다. ①, ②의 자리가 주는 숙제를 피해 보고 싶어서 빛도 양분도 적당한 자리인 ③을 선택했는가? 현명한 선택일지 모르겠다. 숲에도 그런 식물들이 있다.

양분도 적당하고 빛 조건도 좋은 땅을 만날 때야 비로소 싹트기 위한 생리가 작동하는 식물들. 그들의 씨앗이 발아하는 땅은 숲 가장자리다. 그렇다면 과연 빛과 양분 모두가 적당한 숲 가장자리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식물은 소위 ‘꽃길만 걷는 삶’을 살게 될까?

이렇게 숲 가장자리를 차지하며 살아가는 식물들을 산림 생태학에서는 ‘임연식생(林緣植生)’이라 구분하는데, 앞선 글에서 관련 식물 하나를 소개한 적이 있다. (https://bit.ly/47TsCBL 참조)

하나 더, 이번에는 오동나무를 만나보자. 앞서 만난 대나무처럼 오동나무도 매우 대표적인 임연 식물이다. 숲 가장자리에 자리 잡기 좋아하는 식물 하나를 한 번 더 살피는 이유는 생명이 겪어야 하는 역경의 보편성을 분명하게 짚어드리고 싶어서다.

오동나무 잎. 사진 김용규 제공

역경의 보편성

교육청이나 학교가 초청하는 학부모를 위한 강의에 서보면 ‘내 아이가 꽃길만 걷기를 바라는 부모들’을 종종 만난다.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다.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의 삶에 역경과 고초가 있기를 바라겠는가? 하지만 실제를 반영하지 못하는 바람은 허황한 꿈이다.

두려움을 숙주 삼아 자라고 있는 일부 학부모들의 그 간절한 열망은 결과적으로 아주 다양한 괴로움을 낳는다. 아이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부모로부터 출발하는 아이에 대한 높은 기대는 부모 자신을 괴롭히고 아이마저 괴롭게 한다.

또 아이의 성장 과정에는 스스로 하나씩 겪으며 그 과정에서 터득해가야 하는 다양한 관계가 놓여 있는데, 이를 부모가 나서서 막고 대신해 주려는 부모들이 있다. 모두 아이에 대한 지나친, 혹은 그릇된 사랑이 빚는 어리석음이다.

역경은 보편이다. 자연계에 역경이 없는 삶을 사는 생명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부모는 자녀에게 역경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역경을 그 스스로 헤쳐 나갈 지혜를 주는 부모다.

역경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부모다. 훌륭한 부모는 내 아이라는 씨앗의 힘을 믿는 부모다. 그 신비롭고 위대한, 신성이 깃든 존재의 아름다운 힘을 신뢰하는 부모가 진짜 좋은 부모다.

오동나무 속. 사진 김용규 제공

오동나무에 주어진 선물과 숙제

오동나무의 서식지는 앞서 말한 ③의 환경이다. 따라서 숲 가장자리에 사는 그에게 주어진 선물은 앞선 숲 생명들이 이룩해둔 적당한 양분 조건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숲 바깥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살을 넉넉히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생명에게 역경은 보편이다. 오동나무 역시 극복해야 할 삶의 숙제를 안고 태어나는 존재다.

대나무가 그렇듯 오동나무의 자생 환경 역시 다툼의 땅이다. 이미 오동나무의 씨앗이 발아하기 전부터 숲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나무들은 본능적으로 숲 바깥쪽을 향해 가지를 뻗는다. 막힘없이 쏟아지는 햇빛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가장자리에서 이제 막 싹이 튼 오동나무는 최대한 빨리 아직 열려 있는 하늘을 차지해야 한다.

서식지의 특성이 이러하여 오동나무는 가볍고 아주 빠르게 자라는 속성수로 제 ‘삶의 꼴(生態)’을 갖췄다. 지금처럼 가구 공장이 흔하지 않았던 옛 시절, 농경문화 속에는 그래서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는’ 전통이 있었다. 그 시절 가진 것 없는 민중에게는 의식주에 활용할 목재가 귀했다. 딸을 시집보낼 때 혼수로 쓸 장롱의 소재로 오동나무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동나무는 여느 나무들과 달리 유년기의 생장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르다. 여우숲 가장자리에 자생하는 오동나무 몇 그루의 경우 발아 첫해에 약 3m 가까이 자라더니 만 두 살을 넘기자 대략 8~9m까지 자랐다. 유년기에 압도적인 속도로 키를 키워 숲 가장자리의 하늘 공간을 차지해야 하기 위한 전략이다.

빠른 성장을 위해 오동나무는 제 잎을 매우 크게 만드는 전략을 쓴다. (사진, 유년기의 오동나무 잎 참조) 숲 가장자리에 이미 먼저 자리 잡고 사는 다른 나무의 가지가 이미 바깥으로 뻗어 있고, 그래서 태어난 자리에 그늘이 들 경우, 오동나무의 넓은 잎은 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포착하기에 매우 유용하다.

오동나무는 광합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의 잎자루와 어린줄기마저 녹색으로 칠해두고 있다. 잎자루와 어린줄기마저 광합성에 동참하기 위한 전략으로 읽힌다. 그렇게 하여 드디어 숲 가장자리에 자기 자리를 안정되게 확보하게 되면 오동나무는 이제 제 잎의 크기를 줄인다.(사진, 삶의 안정성을 확보한 오동나무의 잎) 이때부터는 큰 것이 오히려 제 삶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과 양분 모두를 누리기에 적절한 환경에서 발아하는 오동나무의 숙제는 무엇일까? 대나무의 그것과 마찬가지, 바로 바람이다. 숲의 최전방에 사는 오동나무는 바람과 맞서야 한다. 특히나 유년기 위에 언급한 사정으로 잎을 최대한으로 키우게 되는데, 이때 잎 한 장의 크기는 성인 서너 명의 얼굴을 모두 가릴 수 있을 만큼 넓게 만들기도 한다. 숲이 가장 무성한 시기인 여름철에 잎은 최대화된다.

이때 장마, 그리고 태풍 몇 개가 숲을 향해 들이친다. 잎이 넓을수록 바람에 대한 저항도 크다. 제 삶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태어난 순간부터 넓게 더 넓게 키워온 오동나무의 잎은 이제 폭풍우 속에서 제 삶을 위협하는 걸림돌로 변한다. 태풍은 개별 생명체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 오동나무는 이 위태로움을 어떻게 넘어섰을까?

오동나무의 그것도 바람과 맞서야 하는 자리에서 태어나는 다른 생명들, 예컨대 대나무나 갈대, 억새의 전략과 비슷하다. 그도 제 속을 비웠다. (사진, 오동나무의 속 참조) 속을 비운 오동나무의 내부 모습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풀도 아닌 나무가 제 속을 비우다니! 그리고 생각했다. 꽃길만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달리 오동나무는 바람이 없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자기 삶을 뒤흔들고 위태롭게 하는 저 태풍과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지를 모색했을 것이다. 그 모색이 이뤄낸 성과가 바로 자기 속을 비우며 자라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자리를 잡기 위해 잎이 가장 넓어야 하는 시기인 유년기에는 속을 비워 바람과 화해하고,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잎의 크기를 줄여 바람과 화해하는 지혜를 찾아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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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가 우리 삶에 건네는 지혜

“꽃길만 걸으세요.” 오늘날 누군가의 SNS 대문이나, 문자 메시지 등에서 종종 만나는 애정 가득한 인사말. 하지만 내가 가장 허무하게 생각하는 인사말이다. 그것은 없는 세계다. 우리 인간 누구에게나 시련과 고난은 찾아온다. 우주는 순경(順境)에 역경(逆境)을 더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역경은 그의 나이나 학벌이나 재력, 혹은 교양이나 신체조건과 아무 상관 없이 찾아온다. 누구나 꽃길을 걷는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꽃길만 걷는 인생은 없다. 그러니 없는 세계를 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오동나무가 그러하듯 역경을 다루며 살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물려줘야 할 것 단 하나를 추천하라면 나는 역경을 다룰 지혜를 상속하라고 권하고 싶다.

덤으로, 나 혹은 내 아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씨앗을 깊게 관찰하기를 권한다. 씨앗 안에 이미 프로그램으로 담긴 자기 완결의 힘, 그 위대함을 알아채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르게 살 힘을 얻을 수 있다. 자기의 힘을 신뢰하는 사람은 꽃길만 걷고 싶다는 없는 세계를 그리워하기보다, 지금 여기 매 순간 당도하는 순경과 역경의 리듬에 발맞춰 춤추듯 살 지혜를 얻어나가게 되어 있다. 오늘은 오동나무에 목례!

-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