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老年의 삶

제 3의 인생을 읽고 -사목 51호 (홍윤숙)

제 3의 인생을 읽고 -사목 51호 (홍윤숙)

"세계가 합리화되고 기계화되면 될수록 사회는 그 유기적 연결을 상실해간다. 옛날의 그립던 이웃사촌의 정다운 사귐도 사라지고 어느 집이나 소수의 가족으로 그것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동시에 사람들은 자연과도 멀어져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시의 무미건조한 잿빛 아스팔트 위에서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살아간다."

이렇게 저자는 현대사회의 측면을 진단하면서 그 사회가 안고 있는 시급한 문제로서 노인문제에 당면했고 그것이 "자신의 전공인 윤리학, 인간학과도 관계 깊은 과제"임을 알고 정면으로 그 문제에 부딪쳐보기로 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원래 디켄 신부가 미국의 독자를 위해 썼던 것을 나중 일본어판으로 개정한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 대상이 미국인 또는 일본인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이제 노인문제는 세계적 문제로 제기되어 있고 우리에게 있어서도 결코 멀고 무관한 남의 이야기 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점차 침식되어 오는 현대적 병폐 속에 조만간 다루어져야 할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디켄 신부는 이 책에서, 노인의 개성을 비롯하여 노년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인 고독이라든가 회한, 공포, 불안, 이기심 등 노인 특유의 생태를 진지하고 세밀하게 분석 진단하면서 그 해답을 어디까지나 노경에 접어든 노인들 자신의 정신적 자각, 원숙한 신앙 등 마음가짐에 의해 얻을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노인들을 위한 정신적 지침서라고 말 할 수 있다. 사실 본문 가운데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지상에 일찌기 생식(生息)했던 인간으로서 현대의 노인처럼 적막한 처지에 놓인 적이 또 있었을까." 우선 늙으면 싫어도 "일선을 물러나야 되는 정년퇴직"이라는 강제적 추방령에 부딪친다.

"여기저기 몸은 아프기 시작하고 정신은 점차 희미해지고" 기력도 쇠퇴하고 "친구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자식들도 자기 가정과 생활에 매여 발이 멀어지고". 그런 변화 속에 노인들은 어쩔 수 없이 조금만 냉대해도 노여움을 타게 되고 스스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음을 비관하여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독을 짓씹게 된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내일없는 불안과 싸워야 한다.

내가 기른 자식들도 들여다보지 않는 버려진 위치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듯,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하는 고독한 노년, 그 노년의 통한을 디켄 신부는 속속들이 파헤치며 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년의 고독, 불안, 질병을 이기는 유일무이한 최선의 길은 다름 아닌 밝고 올바른 신앙생활의 길이며, "원숙한 신앙" 을 통해서만 노년의 병한을 치유할 수 있음을 간곡하고 조리있게 설파하고 있다.

"하느님은 늙은 아브라함을 향해 '고향과 가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이르는 거룩한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주의 명령대로 고향인 하란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의 일흔 다섯 살이었다.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중대한 사명을 받은 것은 그가 완전히 나이 먹어 늙은 후의 일이었다. 하느님은 노인들에게 과제를 부과하실 때가 있으니 그때는 아브라함을 배워 감연히 일어설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디켄 신부는 성서를 인용하면서 하느님 앞에 노인이 때로 젊은이보다도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도 있다. 아무리 작은 생명일지라도 그 태어남과 소멸함이 다같이 오묘하고 절대자 분의 섭리체임을 진실로 깨닫는면 이제 성숙할대로 성숙하여 추수를 앞둔 노년기야말로 생애를 정리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와 마음가짐이 어느 때보다는 시급한 시기임을 알 것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는 마음은 욕망을 버리는 마음이며 욕망을 버리는 마음은 곧 이제 까지 눈을 가로막았던 들보를 뽑아버리는 일이다. 실로 젊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 '인간의 기대를 초월하는 세계'의 존재를 그 눈 비로소 발견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눈으로 본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주신"(1고린 2,9) 그 모든 것을 비로소 발견하는 기쁨, 곧 신앙의 기쁨을 통해 노년은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실로 하느님은 자신의 거처를 알리시기 위해 노년이라는 추수기를 인간에게 마련하고 계심을 이 책은 명백히 알려주고 있다. 다음에 몇 대목을 그대로 옮겨 소개한다.

나이든 이는 나이든 이 답게

노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우선 중요한 것은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긍정하고 기운있게 재 출발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사물의 진가도 알게 되고 이제까지는 없었던 얻기 어려운 기회를 얻을 수도 있는 일이나 노년을 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체념해 버리지 말고 인격완성의 최종단계에 도달하는 그 문을 용감하게 뚫고 나갈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노령에 들어선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그 모습이 전연 다르다. 전자는 침착하게 안정되어 있고 자제심이 있는데 비해 후자는 자제력이 없고 군소리가 많고 사소한 일에도 구애받는다.

깨달음

바르고 아름답게 나이를 먹기 위해 도움이 되는 방법의 하나는 만사에 초월하는 일이다. 한참 일하던 시절엔 사업이며 가족의 일이며 재산상의 일 등 끊임없이 바둥거려야 하고 주위와 사회와의 관계도 밀접하여 세상을 높은데서 전망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것이 노년이 되고 나면 이제까지는 달리 미련을 버리기가 쉬워진다. 자신의 생활환경도 소유물도 거리를 두고 바라다 볼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시야도 열리게 된다.

이렇게 전체를 객관적으로 전망하는 동안에 이윽고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예컨대 인생이라든가 사랑에 대해, 세계라든가 신에 대해, 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해 올바르게 떠난 담담한 심경이기 때문에 사물의 가치도 스스로 분명해진다.

노인이 일단 사리사욕을 버리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 젊은이들은 안심하고 의견을 물으러 올 것이다. 권력으로부터 지혜로 자리를 옮겨 앉은 노인은 젊은 세대에 대하여 이해 있는 현명한 충고를 줄 수가 있다.

그리고 인생의 경험에 미숙한 사람들은 그러한 선배에게 즐겁게 지혜를 빌리러 갈 것이 틀림없다. 노년의 지혜란 두뇌의 날카로움도 아니고 모르는 것 없이 박식하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은 아무리 책을 읽어도, 또 아무리 대학이니 대학원을 나왔다 해도 터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 성장을 따라 생애의 끝까지 가는 동안에 서서히 익어서 완숙해 가는 마음의 지혜다. 노년의 지혜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전진하는 젊은 에네르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귀중한 전통을 유지하는 힘을 가지 노년의 지혜에도 기대를 걸고있다.

노인은 육체적인 전성기는 지났지만 정신적으로는 이제 막 완성된 시기로서 반드시 한 자리 맡아서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친절하게 서둘지 말고 화창하게 웃으면서 침착한 태도로 적절한 가르침을 내려 주는 노인이 있어 준다면 기실 젊은이들은 용기를 갖고 더욱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下略)

고독은 은총

대개의 경우 고독을 적절히 처리할 수 만 있으면 노년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고독이라고 많은 남녀들이 술회하고 있다.(中略)

사실 병이라든가 그밖의 이유로 해서 사람과의 교제가 불가능해질 경우 노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야말로 전면적으로 하느님에게 의지할 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고독을 누구보다도 깊이 체험한 것이 바로 겟세마니 동산과 십자가 위에서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미증유의 고독을 이겨내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 뿐이라는 일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공허를 느낀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마음의 눈이 열리고 하느님이 바로 자기 옆에서 조용히 말씀하시고 계신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하면 고독은 하나의 은총이다. 혼자임을 체험함에 따라 인간은 싫어도 가면을 벗고 자신의 맨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며 그 때문에 신앙도 깊어지고 하느님과의 사귐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심정도 샘솟게 되기 때문이다.

진실로 고독하여 울 때, 유일한 희망이고 위안이 되는 것은 하느님이 자기 옆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내는 일이 아닐까. 아무리 쓸쓸하더라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이상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확신하면 할 수록 노년의 적막도 잊을 수 있다.

그분과의 새로운 사귐에 의해 고독을 이겨내든가 아니면 고독에 굴복하여 절망해 버리든가 결국 인간은 그 어느 한 쪽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때로 하느님은 우리들이 마음을 가다듬어 새롭게 그분과의 사귐을 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고독을 보내시는 것이다.(下略)

고통의 처리

노년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하겠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참고 이겨낸 고통의 일부분을 나누어 갖고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고 그 영광에 참여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교도에게 생애의 과제로 부과되어 있는 일이지만 인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은 더욱 더 절실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며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는 노년의 괴로움을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는지도 모른다. 노년의 괴로움은 신앙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만인 공통의 것이지만 만일 신자라면 그리스도가 지상의 천국을 단 한번도 약속하시지 않았을 뿐더러 성 베드로에 대해 그 만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던 것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버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요한 21,28)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고,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것이 바로 노후에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이다.

때때로 노인들은 남자건 여자건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가 있다. 아무리 섭리를 믿으려 해도 정작 하느님은 침묵하여 말이 없으므로 아무런 위안도 느끼지 못한다. (中略) 노인들은 그런 고독감 또는 육체적 고통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는 것이 보통이다. (中略)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여간해서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잘도 견디어 내기도 한다. 그들은 주어진 괴로움을 지긋이 감수하며 그리스도의 고통에 맞추어 인내해 내는 것이 바로 이웃의 구원을 위한 길이라는 신념에 차 있고 그러한 신념이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의 중요한 동기가 되고 원동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이같이 일심전력으로 남의 행복을 원하는 일이 자신의 불행을 잊어버리는 最良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오로가 특히 강조한 사상,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2고린 1,6)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골로1,24).하는 사상이야말로 고민하는 노인들을 위해 실로 커다란 지주가 되지 않을까 한다. (中略)

사실 노년기의 고통을 겟세마니 동산과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고통에 합일시켜 봉헌함으로써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생애란 결국 주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실제로 그리스도가 지상을 떠나기에 앞서 체험하신 고뇌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이를 먹은 노년기에서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고독과 비탄에 휩싸여 시시각각 다가오는 고통을 예감하면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될 수 있는 일이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마태 26, 39)하고 외치셨다. 루가는 의사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고뇌를 속의 속까지 꿰뚫어 보고 "땀 방울이 커다란 핏방울처럼 땅위에 줄줄이 떨어졌다"(루가 22,44 참조)고 쓰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는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마태 27,46)하고 비통한 말이 그리스도의 입술을 울려 나왔다. 이같이 수난과 임종의 고통으로 하여 그리스도는 우유적 존재인 인간의 허약성을 극도로 체험하시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느님으로서의 위엄은 결코 손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것이 그리스도의 최후의 말씀이었다 하면, 노인들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겟세마니 동산에서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걸음으로써 부활과 새로운 생명을 엿볼 수 있는 행복한 기회를 얻게도 될 것이다.

크리스챤이라면 노년의 고뇌를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고통과 영광, 수난과 부활이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나는 여러분 가운데 원로로 계신 분들에게 같은 원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며 장차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1베드 5,1) 라고 써 보내고 있다. 만년이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죽음의 저쪽 편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임을 크리스챤이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노년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적 오의(奧義)이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챤들은 노년에 들어서면서 부터 더욱 그 오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고 다소나마 그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삼위일체의 각각의 페르소나 사이에 교류하는 생명과 사랑의 움직임에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아마도 노년의 고독을 해소하는 데 최선의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삼위일체는 성인들에게만 필요한 교의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계시중의 계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성숙의 경지에 도달한 고단자들과 특별히 깊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노인이란 각양각색의 인간관계를 남김없이 경험했을 것이고 그 좋은 점과 한계점도 터득했을 터이니 삼위일체의 세 개의 페르소나 사이에 교류하는 무한한 생명과 사랑의 움직임에 스스로 일치하고자 하는 마음이 보다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느님은 결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존재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이라는 세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성립된다.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사랑의 공동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남김없이 자기를 주고, 성신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입김에 의해 존재한다. - "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요한 3,35).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요한 10,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요한 10,38).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요한 15,26) -

이렇듯 삼위일체의 생명의 핵심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아들로부터 성신에게 성신으로부터 아버지에게로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사랑의 움직임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각 위격에 준하는 친밀한 관계를 상호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본래의 자기가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무한히 자기를 주고 무한히 사랑을 받는다는 이상적 관계에 있다. 만일 인간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그것과 비슷한 대인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야말로 충만한 만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야말로 사랑의 완전한 원형으로서 개인 대 개인의 순수한 사랑도 두 사람이 일심동체가 되고 그러면서 각기 개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재발견하는 데까지 가지 않으면 완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삼위일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를 주면 줄수록 본래의 자기가 된다는 역설이 훌륭하게 성립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알고 터득함으로써 노인은 타인과의 사이에 예기치 않았던 친밀한 관계-나와 너와의 만남 -를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랜 세월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사랑이 들추어 내어진 불씨처럼 타오르고 끝없는 에네르기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의 사랑에 일치함으로써 두 가지 일이 가능해진다. 즉, 노년의 고독의 문제가 근본적인 해답을 얻게 될 뿐더러 하느님과의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 상호의 관계도 동시에 깊어질 수 있는 변증법적 프로세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비로운 하느님과의 대화에 참가해서 세 개의 위격 사이에 교류하는 사랑에 일치하면 할수록 남을 위해 더욱 더 자기를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천국에서 영원히 종사할 일은 삼위일체의 사랑의 영위에 동화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천국에 사는 이 끼리도 스스로 친밀도를 더하여 가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느님 곁에서 전개되는 완전무결한 사랑의 대화에 참가함으로써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예비단계에 들어갈 수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