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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왜 절해유?

< 행복의 조건 >

< 행복의 조건 >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설사 지금은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올 것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물론 출세간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말할 수 있으나, 여기서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것보다 평범한 범부가 바라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범부중생들의 진정한 행복은 그렇게 크고 거창한 바람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슈타니파타』 제2장에서 행복의 대한 게송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 어울리는 장소에 살면서 전세(前世)에는 공덕을 쌓고, 스스로 바른 서원(誓願)을 세우는 것(attasammaa-panidhi), 이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이 게송은 인간의 행복이란 좋은 장소에 좋은 사람과 함께 살면서 전생의 공덕을 쌓아 그 선업공덕과 현세에 스스로 바른 서원(誓願)을 일으키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 행복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이지만, 전생의 선업과 현세의 서원이 함께 어울릴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장아함경』의 「십상경(十上經)」에서는 사륜법(四輪法)이라고 하여, 첫째는 나라의 가운데 사는 것(住中國). 둘째는 좋은 사람과 가깝게 사는 것(近善友). 셋째는 스스로 근신하는 것(自謹愼). 넷째는 숙세의 선업을 쌓는 것(宿植善本)을 들고 있다.

이를 필자 나름대로 현대적인 의미로 정리하여 보았을 때 행복의 조건을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건강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건강하여야 몸과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이 무너지면 만사가 소용없다. 둘째는 경제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경제적인 욕심이야 한이 없지만, 평소에 사람노릇하고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하였을 때 이는 바로 고통으로 생각한다. 가난이 생활의 불편정도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인격적인 수행이 많이 된 사람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범부중생들은 가난이 바로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주거환경을 중시하여 “잘 어울리는 장소에 사는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셋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취미생활이 되었던, 신앙생활이 되었던 항상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된다. 반드시 직업만이 아니라 정진이든 염불이든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 넷째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서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희망이란 금생에 희망뿐만 아니라 내생에 대한 바람도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는 원력이 있는 자 만이 가능하다. 이상의 네 가지 중에서 세 가지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 질 수 있지만, 마지막의 희망은 종교적인 신앙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 현세적인 희망만이 아니고 영원한 희망은 서원이 있고 원력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죽음을 맞이한 임종환자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염불을 하며, 내세에 극락이 있다고 믿으면서 임종하는 사람의 얼굴은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마치 잠을 자거나 선정에 든 것과도 같다. 그러나 내세를 부정하고 사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임종은 대단히 험악하고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갈수록 노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 보광 스님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