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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길(平和)

< 내 마음의 디카 >

                               < 내 마음의 디카 >

 

나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못한다. 학창시절에 라디오를 틀어 팝송을 들으며 수험공부를 한 것이 그나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한 나의 유일한 기억이 아닐까? 그런데 집사람은 동시에 많은 일을 잘도 소화해 낸다. 밥 짓고 국 끓이고, 파 썰고 계란 넣고, 세탁기와 청소기 돌리고 영어 공부하는 아들 녀석 야단치고, 오는 전화 받으며 안부도 빼먹지 않는다. 이렇게 능력이 출중하니 내가 미덥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눈총이 무섭다.

어느 책에서 부인과 딸을 태우고 운전하던 남자가 시끄러운 라디오 음악과 재잘거리는 두 여자(?)의 잡담을 견디지 못해 소리를 버럭 지르는 장면을 읽은 적이 있다. 근본적으로 남성은 여러 일을 한꺼번에 못하지만, 여성은 동시에 여러 일을 할 수 있는가 보다. 나만이 아닌가?

그런데 며칠 전 길거리에서 이 공식을 깨는 대단한 남자를 발견했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전화하고, 입으로는 담배를 꼬나물며, 다른 한 손으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세 가지 일을 수행하는 중국집 청년의 비상한 능력에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남녀 차이가 아니라 세대 차이인가?

하긴 젊은이들은 대단하다.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들기고, 귀로는 음악을 들으며, 눈으로는 텔레비전을 보고, 입으로 친구들과 떠들고, 발로 장단까지 맞춘다. 가히 새로운 인종의 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뒤질세라 나도 새로운 취미를 만들었다. 디카(디지털 카메라)로 세상을 찍는 일이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 디카를 갖고 나와 길거리를 찍는다. 찍을 것이 뭐가 그리 많으냐고 하지만, 세상은 너무도 재미있는 소재 덩어리다. 더욱이 필름 카메라는 찍은 후 현상을 해야 했지만, 디카는 컴퓨터 모니터로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지워 버리면 되니 경제적인 부담도 없다. 드디어 지난 학기부터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고 있다. ‘법률과 관계되는 사진을 찍어 올 것!’

길거리를 찍다 보면 세상이 보인다. 요즘은 사라진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현수막을 찍을 때에는 삭막한 현실에 안타까웠지만, 사라져 가는 전당포와 깨진 콜라병을 박은 낡은 담벼락, ‘바보’라고 쓰인 낙서, 다 타 버린 연탄재를 발견하면 새록새록 솟아나는 옛 추억에 따뜻해진다.

우리는 과연 모든 것을 보고 있는가?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볼 생각이 없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산삼은 심마니에게는 보이지만 등산객에는 보이지 않는다. 디카로 세상을 찍지만, 찍히는 것은 사물이 아닌 내 생각, 내 마음이다.

마음의 디카! 하지만 내 디카에는 아직 하느님이 찍히지 않았다.

- 박병식 유스티노·동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