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년의 가장 아름다운 문화와 종교 >
1. 인류에게는 종교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어왔습니다.
아득한 때부터 인류의 문화 속에는 종교라고 일컫는 독특한 '문화'가 있어왔습니다. 그 문화는 한결같은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문제를 가진 존재인데, 그 문제를 안고 살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의 멍에를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해답이 있다. 그 해답을 익혀 따라 살면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문화권에 따라 음식이 다르듯이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해답을 얻게 되는지, 해답의 내용은 또 무엇인지 하는 것은 문화나 역사에 따라 달랐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무척 다양합니다.
불교는 욕심으로 비롯한 고통이 문제이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벗어나 스스로 깨달아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그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은 피조물인데 조물주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죄가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용서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이 해답이라고 가르칩니다. 유교는 사람이 본래 따라야 할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일탈하여 길 아닌 길을 가는데 문제가 있음을 말하면서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한 덕목을 하나하나들어 설명을 해 줍니다.
이슬람교는 신에 대한 불순종이 문제라고 가르치면서 순종하는 삶이 인간이 마땅히 이루어야 할 참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죽음 이후를 가장 큰 문제로 여겼고, 죽음 다음에도 다른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 장례에 온갖 힘을 기울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피라미드는 그 하나의 흔적입니다. 우리 문화 속에는 힘을 신격화하여 삶에서 직면하는 속수무책인 경우에 상응하는 힘을 초빙하여 문제를 풀려는 무속신앙 같은 것도 있습니다. 이처럼 드러나는 모습이나 주장하는 내용이 모두 달라도 그 틀은 여전히 같습니다. 문제를 풀어 삶을 삶답게 살자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종교에 따라 문제와 해답을 제각기 다르게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만, 잘 들어보면 한결같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드높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설명한 많은 가르침을 종교는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참으로 귀한 지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혜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한마디로 다듬어 보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삶을 잘 살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부닥치는 문제란 몸을 포함한 물질적인 것도 있고 정신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들은 아무래도 정신이나 마음에 더 무게를 둡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라지고, 마음을 맑고 따뜻하고 곧게 하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세상살이가 의미 있고 보람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를 찾아가 신도가 되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을 통해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긍정적인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라는 것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미 종교인도 계시고, 비종교인도 계시고, 반종교인도 계시겠지만 그래도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형편을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2. 우리는 노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노인입니다. 이제는 사회에서 하던 일도 다 끝내고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몸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아프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여기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괴롭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추해지는 모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쓸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변에 친구도 줄고, 찾아오거나 찾아갈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염치가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친구를 초대해 돈을 걱정 없이 쓸 만큼 그렇게 여유 있는 삶을 누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또 자식들이나 부부나 모두 오순도순 살면 좋을 텐데 그것도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뜻밖에 홀로 사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자식들을 키우느라 허리가 휘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저 잘나 자라고 어른이 된 것처럼 휘적휘적 떠나간 뒤 소식 전하는 일도 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겪는 일상입니다.
문득 문득 옛날이 회상되기도 합니다. 좋았던 때도 있었고 괴로운 때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아쉬워 가슴이 찡한 사연이 있는가 하면 지금 생각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 괘씸한 경험도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도 있고, 자랑스러운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나 저러나 다 지나간 일입니다.
허무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내다보면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겨울 지나면 다음 겨울을 또 만날지 불안해집니다. 이번 생일이 내 마지막 생일은 아닌지 갑자기 초조해지기도 합니다. 애써 보람으로 내 기억을 채우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텅 빈 공허가 을씨년스럽게 내 가슴 한 구석을 뚫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는 죽음이, 내 죽음이, 바짝 다가온 내 현실이라는 느낌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많은 죽음을 겪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의 죽음도 아닌 내 죽음 차례가 눈앞에 닥쳤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체념도 되고, 그런가 하면 의연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그림자는 나를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참 싫습니다.
이제는 하나하나 내 삶을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합니다. 어쩐지 처량합니다. 그러나 또 어떻게 생각하면 잘 살다 간다는 안도의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남겨놓아야 할 것이 무언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래저래 노년의 삶은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3. 종교는 노년에 이러한 힘이 돼줍니다.
노년은 이처럼 두렵고, 초조하고, 쓸쓸하고, 그런데 쉬고 싶고, 고요하고 싶고, 그런데 그런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한이 풀리지 않아 아직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꿈을 지금이라도 채우려 몸부림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잘 살아온 고은 결로 다듬어진 삶이 없지 않습니다. 참 부러운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삶을 추하고 구겨지고 찟긴 채 끝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면 이제까지 살아온 삶이 너무 딱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 존엄을 지키며 '잘 죽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욕먹지 않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거듭거듭 다짐을 합니다. 돈으로 그렇게 해보려 하기도 합니다. 의리로 그러한 삶을 살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문제를 풀어주지 못한다는 것도 저리게 겪고 있습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바로 이 때 우리에게 맑은 물처럼, 따뜻한 햇볕처럼, 우리를 씻어 주고 안아 줍니다. 부처님께 귀의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또 이렇게 저렇게 깊은 신앙에 잠기면, 일상에서 흔히 겪지 못한 그윽한 분위기 안에서 초조와 불안과 원망과 후회가 잠재워집니다. 그래서 없던 희망도 생깁니다.
그렇다고 새 삶을 살고자 젊은이들처럼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머지 작은 삶이라도 보람 있게 다듬고자 하는 여유가 생기면서 나도 모르게 내 삶의 모습이 덕을 베푸는 자세가 됩니다. 종교 없이도 그러한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종교적인 신앙은 그것을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따라서 사람 관계가 후덕해집니다.
미움이 가십니다. 버릇처럼 젊은이들에게 욕을 하던 못된 행동도 스스고 잠재울 수 있습니다. 싫은 사람, 죽일 놈도 점차 사라집니다. 우리 모두 잘 알지 않습니까? 미움이 얼마나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지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종교는 애써 우리를 가르칩니다. 사랑하라고, 자비스러우라고, 어질게 살라고 진정으로 우리를 아껴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선택하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또 새로운 삶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나 사찰이나 성당에 다니면서 그 일원이 되면 우리는 이미 끝낸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종교공동체라해서 성자나 군자만 있는 곳은 아닙니다. 뜻밖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공동체의 삶은 진지한 신앙과 더불어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해 줍니다. 이제까지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다른 삶을 보여주니까요.
그리고 종교는 한결같이 죽음을 위로해 줍니다. 내세를 원하는 사람은 그 약속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영원한 안식을 얻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차피 맞는 현실인데 죽음을 잘 준비하고 기다릴 줄 알게 해 줍니다. 종교는 우리가 되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도 확신하게 해 줍니다. 우리 모두 절박한 두려움은 죽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종교 안에서는 죽음이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안식과 평화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종교는 이러합니다. 노년의 삶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문화가 종교입니다. 물론 종교적 신앙이 광신이나 맹신으로 흘러 또 다른 독선이나 횡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저어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도 삼가야 할 일입니다. 참으로 자신의 행복을 전해주려면 조용한 증언으로, 말없는 행동으로 이를 수행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어떤 종교도 좋습니다. 노년에 종교를 가지는 것은 마치 신문만을 읽고 살다가 시를 읽는 것과 같은 변화라고 해도 좋습니다. 종교가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우리 노인들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대 명예교수. 종교학.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정 진 홍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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