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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老年의 삶

< 노인의 사색 >

< 노인의 사색 >

東湖春水碧於藍 (동호춘수벽어람)

白鳥分明見兩三 (백조분명견양삼)

柔櫓一聲飛去盡 (유로일성비거진)

夕陽山色滿空潭 (석양산색만공담)

"동쪽 호수의 물빛은 남색 보다 푸르구나

백조 두 마리가 있는 것을 두세 번 보았는데

부드러운 노 젓는 한 번의 소리에

모두가 날아가 버리니

석양의 산색만이 빈 못에 가득하다(하구나)."

가만히 보면 이것은 초연히 소요하는

도사의 마음도 아니요

인생의 파장(罷場)에 황황(惶惶)하는

현대인의 마음도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그저 무정세월을

탄식하는 소리만도 아니요

저승의 복락이나 대의를

생명에 앞세우는 말도 아니다.

어딘지 담담하면서도 뭉클하다.

적이 허무한 여운도 없지 않다.

비록 그 형태는 한시로 되어 있어도

느낌은 분명 한국적인 데가 있다.

자아와 자연과 생의 합일

그리고 안분(安分)으로 무르익은

화평(和平)이 거기 담겨 있다.

그 나름대로 자못 아름다운 마음가짐이다.

이렇듯 사람치고 흐르는 세월에

젊어지는 이 없거늘,

이제는 젊음을 위한 젊음을 구가하다 못해

젊음 아닌 것은 아예 없는 양

살기로 작정한 세상이 왔다고들 한다.

그것은 죽음이 죽음이 아닌 양

살겠다는 말도 되겠고

돌이켜 말하면 삶이 삶이 아닌 양

살겠다는 말도 되겠는데,

이보다 더 가혹한 역설이 또 있겠는가.

아니 이보다 더 가련한 몸부림이 또 있겠는가.

세월이 나를 버릴세라

(한국에야 그런 일이 있으랴만)

깊어가는 주름살에 덩달아

빠알갛게 짙어가는 연지의 외로운 서글픔,

한갓 가식으로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현실의 징후로 여길 수도 있겠다.

기실 이런 데에 엿보이는

삶의 비참한 허구(虛構) 앞에

어찌 생각을 멈추지 않겠는가.

영국문인 이블린. 워는

이 허구의 극단적 귀결을 {사랑받는 자}

들에서 통절히 풍자한 바 있다.

죽은 애견들을 살았을 때보다도 더 예쁘고

생생하게 꾸며주는

헐리욷 장의사의 이야기이다.

더는 어른, 아이, 남자, 여자 사이에

끼어 살면서 갓 태어난 애기의 울음소리,

앓는 이의 신음소리, 늙은이의 망녕소리,

사별의 통곡소리, 아이들의 싸움소리,

웃음소리를 번갈아 들을 수 있던

대가족의 품에서 자라날 수 없게 된,

상하좌우, 단절된 단자적 아파트 생활,

인생의 온갖 냄새마저

'위생적으로' 제거하려는 '문화생활'에

우리도 그만 마취된 것일까.

아니면 허울 좋은 물건도 길들 줄은 모르고

오히려 쓸수록 초라해지는

소비사회에 젖은 나머지

우리 자신마저 어느덧 소모품이 되어

기능을 잃은 잉여물이 될까 두려워

자신의 유용성을 떠들썩하게 과시해야 하는

궁지에 빠진 것일까.

그보다도 무릇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뜻있고, 참으로 값진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아무 쓸데가 없음을,

글자 그대로 무용의 것임을 모르게 된

시대가 왔을까 두렵기도 하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시간이 없다기보다

여가는 알아도

한가는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한가를 모르면 " 때"를 모르고,

때를 모르면 "다함"을 모르고,

"뜻"을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느님 품안에 살도록

불리운 우리에게는

오늘 같은 상황일수록

우리의 때를 담은 끝없는 때가 있고

우리의 다함을 끝없이 더하는

다함이 있음을 묵상함직 하다.

- 춘천교구장 장 익 주교(서강대 교수 시절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