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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女 마더 데레사 님

< 가난한 자의 어머니-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 >​

< 가난한 자의 어머니-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 >

마더 데레사 수녀는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버림받은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가난한 이와 병자들의 어머니”

안정된 수녀원 생활 박차고나와 버림받고 굶주린이 위해 한평생 가난과 고통에 짓눌린 이들을 위해 한 생을 오롯이 바친 마더 데레사 수녀.

항상 구부린 자세로 죽어가는 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보살핀 탓에 등은 활처럼 휘었지만 심장병으로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버림받은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하느님 품에 안긴 지난 1997년 9월 6일 전 세계 언론은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살아있는 성녀, 만인의 어머니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사후 5년이 지나야 시복시성절차를 추진하는 관례를 깨고 마더 데레사 수녀 선종 6년 만인 2003년 10월 19일 그녀를 복자품에 올렸다.

그녀는 한마디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산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는 늘 그녀가 있었기 때문.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 모두를 ‘예수님’으로 여겼던 그의 삶은 어려서부터 시작됐다.

그녀의 본래 이름은 ‘아녜스 곤자 보야주’. 1910년 옛 유고 연방 마케도니아의 스코프예에서 태어나자 알바니아인 부모는 막내딸에게 ‘곤자(꽃망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과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뱄다.

집의 식탁은 늘 구걸하는 걸인들 차지였고, 어머니는 데레사와 함께 음식과 돈을 마련해 가난한 이들을 찾아 다녔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9살 되던 해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또 사기를 당해 가산마저 기우는 아픔을 격었지만 수예품을 팔아 생계를 잇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역경을 이기는 지혜도 배웠다.

본당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신앙을 키워가던 데레사는 예수회 신부에게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인도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에 불타기 시작했으며, 18살 되던 해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했다.

로레토 수녀회가 인도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인도로 건너가 수련을 받고 수녀가 된 그녀는 콜카타에 자리잡고 있는 수녀원에 파견돼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 수녀로 살았다.

행복한 수도생활과는 달리 수녀원 바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과 다를 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남과 동시에 엄청난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이어지면서 인도 전체는 굶주림의 도가니로 빠져 들었기 때문. 그나마 수확한 먹을거리는 군수용으로 사용돼 민중들은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고 땅은 초토화되자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콜카타 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짐승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현실 앞에 데레사 수녀는 안락한 수녀원 생활에 안주할 수 없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차 다질링이라는 곳으로 향하던 그녀는 기차 안에서 버림받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강한 부르심을 깨닫고 이에 응답키로 결심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뜻하는 것은 제가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콜카타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뜻을 수녀회에 밝혔고, 2년 뒤 교황청과 수녀회 본부의 허락을 받았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었다. 데레사 수녀는 로레토 수녀회의 수도복 대신 인도 전통 의상인 ‘사리’ 중 가장 거친 천으로 수도복을 만들어 입고 응급처치법, 주사 및 투약법 등 간단한 의료지식을 익힌 후 콜카타 빈민가로 들어가 가난한 이들의 ‘종’으로 살기 시작했다.

또 칠판과 분필을 살 돈도 없었지만 가난한 이들의 자녀 교육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그는 나뭇가지를 주워 땅바닥을 칠판 삼아 학교를 열었다. 당시 콜카타에는 결핵과 나병을 비롯한 온갖 질병이 창궐했지만 빈민들은 기본적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수녀는 무료진료소도 개설했다. 하지만 늘어나는 학생과 환자들을 혼자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느님은 봉사자를 보내 주었고, 수녀는 이들을 중심으로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창설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설립 목적이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짐승처럼 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었기에 이들을 데려와 돌봐주는 임종자들의 집도 만들었다. 수녀는 이들의 몸과 얼굴을 씻기고 사랑을 쏟으며 ‘품위를 지닌 한 인간’으로 죽음을 맞도록 도왔다. 또 집 없이 떠도는 아이와 장애아를 돌보기 위한 시설, 나환자를 위한 치료센터와 자활공동체, 가난한 이들이 마음 놓고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무료급식소, 결핵요양소, 에이즈 환자를 위한 치료센터 등도 설립했다.

세계는 데레사 수녀의 삶을 극찬하며 생전에 노벨 평화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수여했으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겨진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삶으로 보여준 나눔과 섬김의 영성이다. 그의 영성은 다음의 일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데레사 수녀를 찾아와 물었다.

“하느님이 계시는 데 왜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나누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 물었다.

“그러면 가난을 어떻게 하면 해결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까?” “당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서로 조금씩 나누면 됩니다.”

- 가톨릭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