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세2.16.17ㄷ-18.21-22.마태9.18-26)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네 복음서에 실린 이적(異蹟) 사화 혹은 기적 사화 30편은 크게 네 가지 사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병을 치유하는 치유이적사화, 악령을 추방하는 구마이적사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소생이적사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자연이적사화 4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에는 두 가지 이적사화, 즉 치유이적사화와 소생이적사화가 동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이적사화들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치유이적사화에서 강조되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치유를 위한 가장 1차적인 조건은 믿음입니다.
치유를 이행하는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필요하지만, 치유대상자인 환자의 믿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치유되면 고맙고 되지 않아도 괜찮고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꼭 치유시켜주시리라 믿는 강한 믿음이 치유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신 이유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치유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치유자와 치유 대상자 사이의 교감과 공감입니다.
치유사화와 소생사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열두 해’라는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완전함’ ‘꽉 찬’이라는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증세는 그 어떤 명의(名醫)도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중증이었던 것입니다.
극에 달한 통증, 극단적 고통, 따라서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치유와 소생 사화를 통해 우리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분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그분은 다시 원점에서 다시 한번 출발하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낡은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 말라 죽은 고목에서도 새싹을 돋게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소생 사건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소생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그리도 간절히 반복해서 원하는 육체적 치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끝도 없는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치유, 그래서 우리가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내면의 치유요, 마음의 치유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치유요, 고정관념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살 것이라는 착각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오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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