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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

한여름 터진 원폭 재앙에도 살아난 신앙과 평화

한여름 터진 원폭 재앙에도 살아난 신앙과 평화

 

[특별 기고]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나가사키 추모 순례

내게 일본은 해외 여행지로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다. 덥고 습한 여름 날씨엔 더욱 그렇다. 가톨릭 평화운동 단체인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이하 PCK)는 8월 8일부터 11일까지 3박4일로 나가사키 평화 순례와 포럼을 기획하며 참가자를 모집했다.

창립 때부터 평신도 회원으로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 왔기에 순례에 대한 정보를 일찍 접할 수 있었고 참가를 권유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일본의 여름 날씨와 강행군이 예상되는 일정 때문이었다.

출발 당일 비행기가 인천공항에서 한 시간 반 이상 지연돼 여행의 설렘마저 가라앉아 버렸다. 그렇게 덤덤하고 조금은 뾰족한 마음으로 도착한 나가사키는 이국적이진 않았으나 조용하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순례단은 강우일 주교님(PCK 공동 대표)과 통역 및 안내를 도와주실 현지 자원봉사자를 포함해 2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순례 목적은 원폭 피해를 극복하고 평화의 도시로 거듭난 나가사키를 순례하며, 한국 가톨릭교회가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 함께 느끼고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첫째 날, 일행은 종교인 합동 추모제에 참석했다. 이 추모제는 원폭이 떨어진 정가운데를 뜻하는 폭심(爆心) 공원에서 전야제 형식으로 열렸다. 일본 전통 종교인 신토를 비롯해 개신교, 불교, 천주교, 일본 신흥종교 성직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원폭 피해자들의 넋을 기렸다.

해가 오래전에 졌는데도 공원의 높은 온도와 습도는 낮의 상태 그대로였다. 엄숙히 차려입은 종교인들의 진지한 자세에 절로 숙연함이 느껴졌다. 마지막 순서는 참석자 모두 차례로 나와 제단에 헌화하는 의식이었다. 일정상 옷을 갈아입을 여유가 없어 차림새가 신경 쓰였지만 정성을 다해 헌화했다.

나가사키 폭심 공원에서 전야제 형식으로 열린 종교인 합동 추모제. (사진 제공 = 팍스크리스티코리아)

둘째 날 8월 9일은 나가사키시에서 매년 공식 원폭 추모식을 여는 날이다. 일행은 아침 일찍부터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를 찾아 주모경을 바치며 죽은 영혼들을 위로했다. 이어 원폭 자료관을 둘러보며 피해 참상을 절절히 체험했다.

추모제에는 사전에 등록한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다. 총리와 일본 주재 외국 대사들이 많이 참석하는 행사라 경비가 삼엄했다. 올해 나가사키시는 이스라엘 대사를 초청하지 않아 현지 언론 및 세계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추모 발언과 평화 선언이 이어졌다. 순서들 가운데 내 마음을 울린 건 어린이 합창단이 부른 ‘그 아이’란 곡과 공식 추모곡 ‘천 개의 종이학’이었다. ‘평화를 다짐하며 주홍(朱紅) 학을 접고, 들판에 묻힌 사람들을 위로하며 노란 학을 접는다. 평화와 희망을 바라며 무지개 빛 천개의 종이학을 접는다’는 노랫말은 아름다운 선율과 잘 어울리며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오후에는 일본 가톨릭교회 신앙의 뿌리가 된 순교지와 순례 장소 몇 곳을 돌아보았다. 이 가운데 ‘26인 순교자 기념관’과 민간인 단체가 운영하는 ‘인권평화 자료관’이 기억에 남았다. 특히 ‘인권평화 자료관’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희생과 삶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자료들이 소박하게 전시돼 있었다.

전시관다운 모습조차 갖추지 못하고 일본 평화운동가 35명이 자원봉사로 운영하는 이곳은 개인이 수집한 자료를 일본 민간인 단체가 기증받아 시작되었다고 한다.

벽에 걸린 인권 유린 현장을 담은 사진들과 귀한 자료들이 누렇게 바래고 찢어진 채 제대로 관리받지 못하는 모습이 당시 일본에 살던 조선인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해 역사를 인정하고 참회하며 자발적으로 자료관을 운영하는 일본인들의 존재는 큰 위로가 되었다.

이튿날 마지막 일정을 위해 숙소에서 아주 짧은 휴식을 가졌다. 하루 종일 흘러내린 땀으로 푹 젖어버린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국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휴식 후 다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추모 미사가 열리는 우라카미 대성당이었다. 이 성당은 원래 1945년 8월 9일 원자 폭탄이 떨어진 폭심지에서 7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어서 모두 파괴되고 기둥만 남았다. 지금 성당은 새로 옮긴 자리다.

우라카미 대성당에서 봉헌한 추모 미사. (사진 제공 = 팍스크리스티코리아)

나가사키 대교구는 원폭 투하일에 우라카미 대성당에서 나가사키시에서 주관하는 추모제와 별개로 추모 미사를 드려 왔다. 추모 미사는 나가사키 대교구 마치아키 나카무라 베드로 대주교가 주례했다. 교구 사제, 수도 사제, 수녀 그리고 현지 신자들이 1200여 석을 가득 메웠다.

미사에는 ‘원폭의 성모님’을 제단 오른쪽에 모시는 예절이 있었다. 3000도가 넘는 열화 속에 녹아내리고 파괴되어 두상만 남은 성모님의 처참한 모습이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왈칵’ 눈물이 났다. 나가사키 신자들은 이 두상을 성모님이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신 표지로 여긴다고 한다.

‘나가사키의 종’으로 널리 알려진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오랜 박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안정을 찾아가던 나가사키 신자들이 또다시 비극적인 사건으로 희생된 것을 두고, "고인들을 하느님께 바친 번제물로 여기자"라고 말해 많은 신자에게 극심한 분노와 충격을 주었다.

나가이 박사는 어떻게든 이 비극을 신앙의 사건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의 이 신학적 해석은 당시 신자들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이제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원폭의 성모님’을 마주한 순간 나는 나가이 박사가 어떤 심정으로 신자들의 고귀한 생명을 ‘번제물’로 표현하고자 했는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8월 9일 원자 폭탄이 나가사키 도심을 폐허로 만들고 모든 사람이 고통 속에 신음할 때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녹아내리고 잘린 성모상을 나가사키 신자들은 고이 간직했다.

아마도 그들은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리며 나가사키 재건과 평화의 도시로 거듭나는 날을 꿈꾸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재앙 앞에 하느님을 원망하고 절망에 신음하기보다 함께 고통받으며 아파하시는 성모님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나가사키 시민들의 신앙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나가사키 평화 포럼 참석자들. (사진 제공 = 팍스크리스티코리아)

셋째 날, PCK가 공동 주최하고 주관하는 ‘나가사키 평화 포럼’에 참석했다. 순례 중 포럼에 참석하는 것이 낯설고 걱정되었지만 장장 7시간의 국제 포럼을 무사히 마치는 순간 실무팀과 순례단 모두 고무되었다.

포럼에는 한국, 일본, 미국 주교 다섯 분과 현장 평화 활동가 그리고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에 참석했던 일본인 청년, 고등학생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동북아와 세계에서 더 이상의 핵무기를 개발, 보유, 사용하지 않게 할 방법을 여러모로 모색하고 향후 이를 위한 연대 활동을 지속해 나가자고 결의했다.

2027년 가톨릭 세계청년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데 PCK가 이러한 결의를 이어받아 많은 신자에게서 평화를 향한 열망을 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 날,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와병 생활을 하며 생을 마감한 ‘여기당’(如己堂)을 찾았다. 여기(如己)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여기애인’(如己愛人) 네 글자의 줄임말이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이 글자를 두 자녀에 남기고 선종했는데 그의 삶이 두 평 남짓, 작고 소박한 ‘여기당’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우라카미 대성당에서 순례 여정을 마무리하며 주일 미사를 드렸다. ‘누군가는 평생 이름조차 들어보도 못했을 우라카미 대성당에서 두 번째 미사를 드리고 있구나!’ 생각하니 뭉클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주일 미사 후 성모님 두상이 있는 경당에서. (사진 제공 = 팍스크리스티코리아)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나가사키는 비극적 역사를 지닌 일본의 한 도시일 뿐이었다. 그 고통의 역사에 잠시 관심은 가졌으나 아픔을 공감할 순 없었다. 순례를 떠날 때도 ‘일본을 왜 하필이면 이 더위에 가는가?’라고 마뜩잖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누군가 나가사키 여행을 계획한다면 ‘꼭 한여름에 가 보시라!’ 권하고 싶다. 여름 한낮의 나가사키를 걸으며 죽은 이들이 아닌 당시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을 상상해 보길 바란다. 원자폭탄의 열화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녹아내린 피부에 쏟아지는 태양열은 살아 있음이 후회될 만큼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당시 일제에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나가사키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희생과 비통한 삶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가사키를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피폭 이후 그 어디서도 보상받지 못한 채 모든 고통을 홀로 감당해 온 우리 이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또한 치유의 삶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고 기도하며 그분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전범 국가인 일본에서 우리는 피해자를 추모하며 평화 순례를 했다. 미사도 함께 드리고 우리의 순례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현지인도 많이 만났다.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었다. 강우일 주교님께서 강복을 주시며 하신 말씀처럼 “스스로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바라며 모인 이들”이 이 땅 가득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양윤하 수산나

팍스크리스티코리아(PCK) 회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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