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랑은 예수님” 첫 다짐대로 평생 가난한 이웃 위해 헌신
[특별기고] 양 수산나 여사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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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협조자(Auxilista)이며 대구대교구 가톨릭푸름터 설립자인 양 수산나 여사(Susannah Mary Younger)가 9월 10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1959년 한국에 입국해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았던 여사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대구대교구 정석수 신부(유스티노·대구대교구 대덕본당 주임)가 글을 보내왔다. 정 신부는 양 수산나 여사가 삶의 마지막 5년을 보냈던 대구가톨릭요양원에서 인연을 맺었다.
사도직협조자로 60년 헌신한 양 수산나 여사.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저는 대구가톨릭요양원에서 사목할 당시, 양 수산나 여사님이 입소하신 2019년 4월 17일부터 2021년 8월 26일까지 한 지붕 아래 매일 만났습니다. 여사님은 연세에 비해 건강하셨지만,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자발적으로 요양원에 입소하신 것입니다. 저는 매일 저녁 9시가 되면 여사님을 찾아가 함께 뉴스를 시청하고 차도 한잔하면서 그분의 지나온 삶에 대해 들었습니다.
■ 모든 것 버리고 한국에
여사님은 65년 전인 1959년 12월 8일 한국에 입국하셨습니다. 영국에서 배를 타고 3개월 만에 부산항에 도착하셨는데, 효성여대에 기증할 피아노 7대를 배에 싣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사셨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신 여사님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것이 하나의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역사에 놀라워하셨습니다. 약혼자가 있었지만, 한국으로 오는 배에서 약혼반지를 바다에 던지며 ‘나의 신랑은 예수님’이라고 굳게 다짐하셨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사도직 협조자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직 협조자로서 일생을 오롯이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삶, 십자가 지는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원래 여사님의 집안은 성공회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사님은 옥스퍼드대학생이던 시절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구원의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오고, 가톨릭교회가 신앙의 본류라는 것을 깨달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친께 이를 알려 드렸고, 부친께서도 ‘지성이 있는 사람이면 깨달을 수 있는 진리’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셨다고 했습니다.
1959년 가난했던 한국땅 밟아
소외된 여성 복지 위해 힘쓰며
현 ‘가톨릭푸름터’ 발판 마련
지역 사회복지에 큰 공…2020년 대통령 표창
■ 가난한 여성과 거리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여사님은 가난한 한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웃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가, 그들의 삶을 복음, 즉 기쁜 소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한국 활동 초창기 일화 가운데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여사님은 대구의 집창촌 여성들을 찾아가서 언니가 되어 주면서, 그들을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곳이지만 외국인이었기에 그곳의 포주들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막장으로 내몰린 곳으로 직접 찾아가 그곳 여성들과 대화하면서 많은 이들이 집에서 숟가락 하나 덜기 위해 고향을 떠나왔던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의 수입은 대부분 집으로 보내어지고 동생들 학비와 가정의 살림살이로 사용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이 삶을 다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수렁에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문 앞에 거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여사님의 종아리를 잡았고 여사님은 방어 차원에서 손찌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날, 그를 찾아 사과까지 하시면서 그를 돌보셨다고 했습니다.
여사님의 노력 덕분에 6·25전쟁 직후 가난한 한국 사회에서 더욱더 설 자리가 없던 여성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을 통하여 삶의 방향을 전환토록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리에 폐지를 줍던 이들을 도우셨습니다. 여사님의 이런 수고는 지금의 ‘가톨릭푸름터’라는 기관의 시작이었습니다.
1962년 소외된 여성들과 함께하고 있는 양 수산나 여사. 당시 여사는 가톨릭여자기술원(현 가톨릭푸름터)를 설립하면서 소외된 청소년과 여성들의 자립을 도왔다. 월간 ‘빛’ 제공
■ 모두를 아우르는 삶
또 하나의 추억도 말씀하셨는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과의 일화입니다. 가톨릭신문 사장을 맡으시던 당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식을 번역하고 신문에 기고를 하시면서 자주 당신의 처소에 들러 국수를 맛나게 드시던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기쁘게 일하시던 김수환 신부님이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받아 떠나시던 추억도 전해 주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다녀오신 서정길(요한) 대주교님을 만났을 때는 한 가지 질문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무엇입니까?” 서 대주교님은 “한 마디로 ‘평신도요’”라고 대답하셨다고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평신도가 세상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미리 일깨워 준 일화입니다.
2019년 12월 대구가톨릭요양원에서 대화를 나눈 뒤 찍은 사진. 왼쪽부터 전성훈 신부, 양 수산나 여사, 정석수 신부, 김창욱 신부. 정석수 신부 제공
요양원에서 여사님이 참으로 복된 분이라고 깨달은 것은 면회자들을 보면서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송어를 들여와서 양식에 성공하도록 애쓰신 전임 경상북도 도지사부터 시작하여 옥스퍼드대학교 동문의 방문까지 참으로 다양한 분들과 만나시는 모습은 천국의 기쁨을 살고 계시는 듯했습니다.
2019년 12월 8일 대한민국 입국 60주년 기념미사를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님께서 집전해 주셨고, 2020년 5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올해의 이민자상’을 받으셨습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 가장 소외된 이들부터 시작하여 대통령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삶이셨습니다.
대구가톨릭요양원 직원들을 두고 “착해빠졌다~”라고 말씀하시던 모습, 영국의 여동생과 영상통화를 하며 행복해하시던 모습까지, 유머와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여사님은 매일 미사에 참여하시고 선종 하루 전까지 요양원 생활을 하시다가 병자성사를 받으시고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음날 가장 친밀하셨던 사도직 협조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시는 가운데 선종하셨습니다. 여사님의 삶은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라는 복음 말씀을 그대로 실현하신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우 미사를 봉헌한 날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발길처럼,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분의 삶은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삶과 겹쳐졌습니다.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양 수산나를 복음에로 이끄시어 교회의 봉헌된 평신도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에 사명을 다하도록 축복하셨으니, 이젠 천국에서 ‘울랄라’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글 _ 정석수 신부(유스티노·대구대교구 대덕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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