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 아플 자신이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는 안 아플 자신이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1980년대에는 군 단위 지자체들이 도시의 은퇴한 노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정비하느라 바빴다. 당연히 노인들을 위한 전원주택 단지 개발이 그 핵심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사그라지고 말았는데, 이유는 병원이 멀다는 데에 있었다. 공기 좋은 곳에서 텃밭 가꾸는 전원생활이 매력적이긴 한데, 생명을 담보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더라는 조건이 우선했다. 물론 노인과 병원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무리한 접근은 아니다. 노화와 병 발생과의 관계는 비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늙을수록 전문 병원과 대형 병원이 많은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절대 명제 같은 철칙이 만들어졌다. 또 있다. 산이 많아 전국이 공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나라의 계곡마다에는 별장 같은 집이 많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는데, 짓거나 사기는 쉬워도 팔리지는 않는다고 치명적인 단점이 소문나기 시작하면서 오지나 풍경 좋은 곳의 잘나가던 멋진 집들이 그만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은 그나마 제주도에서 배운 1년살이, 세달살이, 한달살이 등의 전셋집으로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역시 이유는 병원에 있었다. 병원이 문제였고 지금도 여전히 병원이 문제다.
수녀원들이 안고 있는 요즈음의 고민 중엔 수녀들의 노화로 병원비 부담이 많아진다는 걱정도 있다. 그래서 어느 수녀원에 내가 제안하기를 “아프지 않게 해 드릴게요”였다. 의사도 아닌 신부가 병이 안 생기게 해 준다니 처음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진짜 안 아프게 만들어 드렸다. 비결이 궁금할 것이다. 몸살림운동!
20세기가 시작하던 시절에 우리나라는 근대화의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아쉽게도 우리의 근대화란 바로 서양화를 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좋은 전통들이 과거의 산물이란 이름으로 대부분 지워지고 말았다. 그 좋은 우리의 전통 중에는 몸살림운동도 있다.
추정하기를 1910년경에 태어난 무애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최천리 선생을 만나 몸살림운동을 30여 년이나 배우면서 주로 곳곳의 화전민들과 오지의 동네들을 오가며 탁발승으로 살면서 사라져 가는 몸살림운동을 가르치고 또 직접 치유 활동을 하였다.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라”는 그리스도교 복음과 흡사한 최천리 선생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실천한 무애스님 덕분에 살아남은 우리 고유의 치유 운동은 우여곡절을 겪고서 그렇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수녀원에서 몸살림운동을 단체로 강습 받도록 주선하였다. 그러자 노인 수녀님들부터 건강해졌다. 왜냐면 몸살림운동은 ‘막힌 곳을 뚫어 주고 굽은 곳을 펴 주는 데’에 탁월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노화로 막혔던 곳을 뚫어 주고 노동으로 굽었던 곳을 펴 주니 건강한 기운을 회복한 셈이라고나 할까.
효과를 확인한 수녀원은 이어서 그 몸살림운동 강사를 외국의 분원들로 모시고 가서 남미와 동남아의 병원과는 거리가 먼 빈민 지역 주민들이 자가 치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듯 병원이 없으면 안 아프게, 병원이 멀어도 노인들이 살기 편하게 만드는 보물들이 바로 우리의 전통 안에는 많이 들어 있다. 불행히도 서양 의학이 지배하여 우리 것이라면 무조건 열등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비뚤어진 인식 때문에 대체의학으로 가능한 분야를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오지로 들어가 사는 일이 겁나지 않다. 병원이 멀면 안 아프게 살고, 노동이 힘들면 젊은이와 함께하고, 농작물을 돈으로 바꾸기 힘들면 직거래로 길을 터면서 살면 간단하다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낙관론이라기보다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생각이라고 치부할 만하다.
그러나 몸살림운동으로 운동하고, 사상체질에 바탕을 두어 내 체질에 맞는 재료로 먹거리를 선택하고, 수맥을 방지하여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하는 간단한 요령을 배운 탓에 안 아플 자신감이 생겼다.
병원에만 의존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인지, 대체의학을 비롯한 좋은 방법들을 함께 활용하는 것이 과학적인 사고인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암 투병 중인 친구의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조영옥
하느님의 자비심은 교회를 통해 드러나야
1997년의 IMF 아시아 금융위기 사태가 일어나자 우리신학연구소는 이런 사태의 근원을 밝히고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하여, 그 당시 우리에게는 생소했던 ‘신자유주의’의 정체를 밝히고 그 이념과 횡포에 대해 전국적으로 홍보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를 맞은 국가들과의 연대 작업도 펼쳐 나갔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전국 성당을 다니는 홍보 작업에서 나는 대구관구를 맡았기에 청주교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대구관구는 대구, 부산, 청주, 마산, 안동교구가 속해 있다.
그 당시 나는 차가 없었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는데 충주시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해당 성당으로 이동하였다. 택시 기사님에게 어느 성당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 없이 이동하기에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위치를 아느냐고. 그러자 택시기사님이 말했다. 충주에서 성당들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데유? 그래서 성당에 도착하여 본당 신부님께 그런 이야기를 전했더니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충주에는 일찍이 1955년부터 청각장애인을 위한 초중고 과정의 성심학교가 있었기에 10만 도시에 성당이 무려 10개나 있다며, 복지와 선교의 연관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서울시 영등포구에 성당이 딱 10개 있다. 영등포구 인구는 37만이다. 충주의 선교율이 얼마나 높은지 바로 비교가 될 수 있다. 충주가 지금은 인구가 20만으로 늘어났지만 성당은 13개이니 초창기에 만들어진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복지와 선교의 관계를 잘 말해 준다. 복지 사업의 혜택은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위안과 행복을 안겨 주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교회는 주님의 길을 뒤따르며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교리다. 주변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고, 시대의 징표를 읽어 내어야 하고, 구석지고 외롭고 소외된 곳을 메워 나가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심을 교회는 어떻게 드러내어야 하는가? 우리 한국 교회의 초대 선조들이 잘 보여 준다. 양반 천민 구분이 없는 평등한 세상, 남녀 차별이 없는 인간 존중의 세상,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나눔의 실천....
80년대부터 우리 한국 교회는 ‘섬김과 나눔’을 교회의 지표로 삼아 실천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교회의 이런 기본 정신이 쇠퇴해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시대의 교회가 박해받던 초대 교회보다 더 실천하지 못한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듣는다.
레지오의 선행 보고는 이웃에 대한 돌봄보다 교회 행사 참여가 주종을 이루고, 소공동체의 나눔도 마음 위로 차원에서 이루어져 크게 다르지 않다는 비판을 듣는다. 척박한 땅에 교회를 세우던 시절의 우리의 옛 자세를 돌아보면서 교회마저 자본주의에 편입되지 않도록 이렇게 묻고 싶다. 세상의 빛은 어디에서? 세상의 소금은 어떻게?
조욱종 신부(사도요한) 부산교구 은퇴 사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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