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내가 무언가를 청할 때 하느님은 다음의 세 가지 예 중 하나로 답하신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스”(YES), 둘째는 “예스(YES), 그런데 당장은 아니야”, 셋째는 “안 돼(NO). 왜냐하면, 내가 너를 위해 더 나은 걸 준비하고 있거든.”
첫째 대답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단순하고 분명한 허락의 표현입니다. 둘째 대답은 허락하시긴 하는데 그 적절한 ‘때’가 무르익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대답은 내 청을 불허하시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 주신다고 하니 실망보다 기대를 품게 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응답체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당장 청하는 것을 주시지 않아도, 때가 되면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할 수 있게 되지요. 예수님은 우리도 그렇게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원하는 답을 즉시 얻지 못한다고 조바심을 내거나 딴 데를 기웃거릴 생각 말고 간절히, 꾸준히 하느님 아버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드시는 예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제목은 사실 ‘끈질긴 과부의 비유’라고 불러야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교만하고 고집 센 나머지 감히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판결하는 재판관의 불의함을 힘없고 가난한 과부의 끈질긴 인내가 이겼습니다. 대개 재판이 벌어지면 거기에 관계된 사람들은 자기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길 바라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청탁’을 넣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고 그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기를 청했습니다. 그저 재판관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했기에,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았기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분임을, 그저 우리가 당신께 청한 그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시고 바로 그것을 내어주시는 사려 깊은 분임을 알았던 겁니다. 이처럼 나의 바람이 하느님의 뜻과 제대로 일치하면 그 기도에는 반드시 ‘올바른 응답’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지체 없이’ 응답을 주신다는 말씀은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분께 기도하면서 쌓인 우리의 경험 때문입니다. 내가 그분께 기도하자마자 그 기도를 즉시 이뤄주셨던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기다리다 지치고 내 바람과 달라서 실망했던 기억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매번 지체 없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예수님께서도 굳이 낙담하지 말라고, 그분께 끈질기게 매달리라고 주문하실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니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그분께 청하는 ‘즉시’ 이뤄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응답의 ‘때’를 결정하시는 것은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라는, 내 청원에 언제 어떤 응답을 주실지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기도에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께서 ‘때의 주인’이시라는 믿음,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그분께서 가장 잘 아신다는 믿음, 그렇기에 당신이 원하시는 가장 적당한 때에 당신께서 준비하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청하는데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께 제대로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 욕망을 채우는 데 쓰려고 청하는 것들은 나를 집착으로 병들게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 절대 이뤄질 리가 없지요.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협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따르는 순응의 과정입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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