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이 제대로 깨운, 국힘의 ‘민정당’ 유전자 [성한용 칼럼]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1일 오전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아 현충탑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한용 | 정치부 선임기자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창당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며 무너졌다. 자유당은 이승만 독재의 상징으로 남았다.
민주공화당(공화당)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1963년 창당했다. 1979년 10·26으로 무너졌다. 공화당은 박정희 독재의 상징으로 남았다.
민주정의당(민정당)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1981년 창당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무너질 뻔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돼 회생했다.
민심은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만들어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명령했다. 1990년 1월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했다.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했다. 정치적 야합이었다. 대화와 타협을 명령한 민심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독재의 상징이었던 민정당은 소멸하지 않았다. 3당 합당의 환골탈태 효과 때문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노태우를 내란죄로 처벌했다.
이후 이른바 보수 정당의 법통은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미래통합당-자유한국당-국민의힘으로 이어지고 있다.
보수 정당은 1997년 외환위기로 정권을 내줬지만 2007년 이명박,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을 계속 당선시켰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용주의,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등 개혁적 보수, 합리적 보수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중도층 확장에 성공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당하고 감옥에 갔다. 이명박 대통령도 감옥에 갔다. 그래도 보수 정당은 무너지지 않았다. 당원들이 대통령과 정당을 분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 정당으로서 자생적 존립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그랬던 국민의힘이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이후 급속히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국민의힘 의원 108명 중에서 12월3일 밤 비상계엄 해제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간 사람은 18명에 불과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한 사람은 겨우 12명이었다.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은 내란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법원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사법 체계를 깡그리 부정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을 구하겠다며 한덕수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에 반대했다. 국회의 한덕수 대행 탄핵소추 때 의원들은 본회의장 앞으로 몰려나가 “원천 무효”를 외쳤다.
한덕수 대행 탄핵소추가 무효라면 최상목 대행 체제를 인정하면 안 된다. 최상목 대행 퇴진 투쟁이라도 벌여야 한다. 그게 논리적이다. 하지만 권성동 원내대표는 최상목 대행에게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재판관 2명을 임명하자 이번에는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았다”고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은 비상계엄은 옹호하면서 재판관 임명이 국무회의 심의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하면서도 낯빛을 전혀 붉히지 않는다.
지금 국민의힘은 김영삼의 신한국당, 이명박의 한나라당,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취했던 중도 확장 노선에서 완전히 벗어난 행태를 보이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거리 투쟁에 나설 기세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대통령을 꽉 끌어안은 채 함께 침몰하려고 작정한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럴까?
첫째, 의원 이기주의다. 한나라당부터 국민의힘까지 보수 정당의 수도권 의석은 2008년 81석, 2012년 43석, 2016년 35석, 2020년 16석, 2024년 19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영남 의석은 2008년 46석에서 2024년 59석으로 늘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의원들은 극우 세력에 의존해 어떻게든 버티다가 2028년 총선에서 나만 당선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집권은 포기한 셈이다.
둘째, 유전자다. 국민의힘 몸속에는 아마도 민정당 유전자가 잠복해 있었을 것이다. 복종을 중시하는 군사문화, 영남 중심의 지역 패권주의, 분단 체제에 기생하는 색깔론 같은 것들이다. 12·3 비상계엄을 계기로 민정당 유전자가 한꺼번에 다 깨어난 것 같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수십년간 쌓아온 이른바 보수의 아성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고 있다. 거인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안타깝다.
'이 시대 길동무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0) | 2025.01.07 |
---|---|
왕을 꿈꿨던 윤석열씨, 당신은 이길 수 없습니다 (0) | 2025.01.07 |
12·14 시민혁명의 힘, 국가 대개혁의 길로 (5) | 2025.01.01 |
풀보다 먼저 눕던 한덕수 ‘미스터리’ [박찬수 칼럼] (1) | 2024.12.30 |
윤석열이 긁은 ’계엄의 비용’…“5100만명이 장기 할부로 갚아야” (4) | 2024.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