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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며 목 축일 샘-法頂

<인간과 자연>

<인간과 자연>

자연은 스스로를 조절할 뿐 파괴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문명의 인간이 자연을 허물과 더럽힌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도외시한 무절제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인간생활의 원천인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이 말할 수 없이 오염되어가고 있다. 거대한 물질의 더미에 현혹되어 천혜의 고마운 자연과 환경을 사람의 손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 어리석은 오늘의 현실이다.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아득한 옛적부터 많은 것을 아낌없이 무상으로 베풀어오고 있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밝고 따뜻한 햇살과 천연의 생수와 강물, 침묵에 잠긴 고요, 별이 빛나는 밤하늘, 논밭의 기름진 흙,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사랑스럽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그리고 생기에 넘치는 숲......

온종일 주워섬긴다 할지라도 자연의 혜택을 말로는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들 인간의 대부분은 감사할 줄을 모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 곁에 이런 자연의 은혜가 없다면 잠시도 살아갈 수 없는 처지인데도, 현대인들은 고마운 자연 앞에 너무도 무감각하다.

그저 많은 것을 차지하면서 편리하게만 살려고 하는 약삭빠르고 탐욕스런 현대인들은, 흑심하게 빼앗겨 앓고 있는 자연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인간과 자연은 빼앗고 빼앗기는 약탈과 주종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은 인간에게 있어서 원천적인 삶의 터전이고 배경이다. 문명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하나의 도구이고 수단이지 최후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자연과 인간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회복되어야 한다. 파괴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 안에서만 우리들 인간도 덜 황폐되고 덜 오염되어, 인간 본래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지치고 상처받은 인생이 기대고 쉬면서 위로받을 유일한 휴식의 공간이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죽은 후 차디찬 시신이 되어 묻히거나 한줌의 재로 뿌려질 곳도 또한 이 자연임을 명심해야 한다.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자연의 훼손과 환경의 오염이 날로 격심해져 우리들 삶의 터전이 전에 없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다.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1971년에 발표되어 우리를 놀라게 했던 '로마클럽 보고서'는 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핵전쟁의 공포와 함께 인구와 식량의 문제, 공업화에 따른 빈부의 격차, 자원의 고갈, 환경 오염 등의 문제는 인류의 미래를 어둡고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소원해지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파괴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평화의 이름 아래 오늘의 세계가 지구상의 생명들을 보조리,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죽이고도 남을 가공할 양의 핵폭탄을 만들어 저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과 인간 사이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불행한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산과 바다와 강과 토지와 대기가 심각하게 오염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뚜렷한 증거다.

인류의 화합과 전진을 다짐하는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이런 국제학술회의를 갖게 된 것도, 인류의 당면 과제를 극복하려는 데에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물질적인 또는 정신적인 필수 불가결한 수많은 것들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제공해주고 있다.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듯이 그렇게 준다.

이와 같은 자연의 선물을 받아서 제대로 적절히 사용하면 인간의 생활에 빛이 나고 유익하다. 그러나 그 선물을 과용하거나 잘못 사용하면 거기에 상응한 배은망덕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지구가 지니고 있는 핵연료는 인간끼리의 살상이나 지구의 파멸을 위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개발한 핵무기 앞에 인류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를 지나치게 소비함으로써, 인간이 잘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에 위협을 받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연료의 지나친 소비는 지구를 하나의 커다란 온실로 만들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전문가들에 의해 조사 보고되고 있다. 그 결과 극심한 가뭄으로 가축들의 생존에 대한 위협과 농산물의 감소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킨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의 지불이며 경고다. 자식이 '어머니'의 은혜와 제 분수를 모르고 너무 오만해진 데서 온 인과응보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고, 넘치는 것은 덜 참만 못하다. 적은 것일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 영국의 경제학자 E. F. 슈마허가 지적했듯이, 무한한 성장은 유한한 세계에 적합하지 않다.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모성일 뿐 아니라 위대한 교사다. 자연에는 그 나름의 뚜렷한 질서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의 질서가 있고, 뿌려서 가꾼 대로 거두는 수확의 질서가 있다.

가뭄이 심하면 비를 내려 해갈시키고, 홍수가 나면 비를 멎게 하여 날이 든다. 바람을 일으켜 갇혀 있는 것을 풀어주고 낡은 것을 떨어뜨리며, 끊임없이 흐르게 하여 부패를 막는다. 밝은 낮에 일하면서 쌓인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 어둠이 내려 쉬도록 해준다.

이와 같은 자연의 질서에 우리들 인간은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 삶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나무와 물과 흙과 바위로 이루어진 단순한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커다란 생명체이며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속이다. 자연에는 꽃이 피고 지는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는 벽돌과 시멘트로 쌓아 올린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묻지 않은 대자연 속에서 움트고 자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무들이 청청한 가지를 펼치고 있는 숲 속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도도히 흐르는 강변에서, 또는 밤과 낮의 기온차가 심한 침묵의 사막에서 위대한 사상과 종교가 움트게 됐다는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육신에 탈이 나거나 병이 들면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지만, 영혼이 지쳐 있거나 병들어 있을 때는 병원을 찾아가도 쉽게 낫지 못한다. 어린애가 엄마의 품을 찾아가듯이 자연의 품속에 안겨,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질서를 우리 것으로 받아들일 때에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정신질환인 노이로제는 약물 치료로는 나을 수 없는 문명의 병이다. 자연과 더불어 가장 자연스러운 생활을 통해서만 정신상태는 자연스럽게 제 기능을 하게 된다.

대지와 수목과 화초와 물을 가까이하면 사람의 정신상태가 지극히 평온해진다. 조급히 서둘 필요도 없이 질서정연한 생명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를 스스로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자연 앞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 같은 것은 접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래야 침묵 속에서 '우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이 침묵 속에서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신비를 캐낼 수 있다. 하나의 씨앗이 대지에 묻혀 움이 트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그런 인내와 침묵이 자연 속에서는 절대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연 자체가 원초적인 침묵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실체를 인식하려면 무엇보다도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이전에 무거운 침묵이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이야말로 자연의 말이고 우주의 언어다. 뛰어난 사상과 위대한 종교는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를 치는 시끄러운 언어에서가 아니라, 자연의 침묵에서 싹텄다는 사실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사막의 교부들이나 불교의 선사들이 우주의 언어인 이 침묵속에서 성장하면서 거듭나게 됐다는 사실은, 말을 참지 못하는 현대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침묵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자기가 만들어낸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여기에서 말한 '땅'은 '자연'으로 대체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이 정복의 사상에 기반을 둔 유럽의 역사가 끝없는 정복과 착취와 힘과 진압의 역사라는 사실은 낱낱이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정복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사람이 어떻게 이 거대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단 말인가. 휘몰아치는 태풍과 폭우와 논바닥이 갈라지고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낸 가뭄과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면서 폭발하는 화산과 지진을 사람이 어떻게 정복할 수 있단 말인가?

흔히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악의 등정에서 '무슨 봉을 정복 운운'하는 신문기사나 텔레비전과 라디오 뉴스를 듣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잠꼬대 같은 소리다. 그 산봉우리를 참으로 정복했다면 거기서 오랫동안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 시간도 못 되어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오고 말지 않는가.

매스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배울 만큼 배운 똑똑한 사람들일텐데 번번이 이처럼 무식한 표현을 서슴없이 쓰고 있다. 역시 <창세기>의 후예들인 모양이다.

목숨을 걸고 기어오르는 그 의지력과 용기가 가상해서 산이 잠시 받아들인 줄도 모르고, 정복이라고 하니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 소리인가.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산의 실체를 모르고 방심하거나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지나친 과욕과 자만에서 오는 결과다.

금세기 전반기를 살다가 간 영국의 등산가이며 저술가인 F. S. 스마이드는 <산의 정기>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은 우리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훈련으로 정복되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한 부분이면 만물에 이어진 아름다움과 장엄이다. 산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삶의 의미를 배운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이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은 자연과의 친화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정상에 도달하는 것만이 등산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날의 계획 중 한 가닥 황금의 실일 뿐이다. 마치 군인들이 일찍이 다른 군인들이 점령한 도시를 짓밟듯이 정상을 짓밟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만 감사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방문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정신은 비단 등산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사에도 해당될 것이다. 어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인생의 목적이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아가는 데에 삶의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산마루가 아니고 산마루에 도달하는 그일이다. 스마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관이 아니라 왕국이라는 것. 등산의 기쁨은 내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서, 차분히 산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산의 향기를 맡고, 산의 맥박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있다.

그리고 정상에서의 침묵은 가장 느긋하고 거룩한 휴식임을 알아야 한다. 갖은 고생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이 풍진 세상을 다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저녁노을 앞에서 할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저 묵묵히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자취를 되돌아볼 뿐이지.

그럼, 자연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냥 있는 땅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친 삶의 터전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아득한 그 옛적부터 삶을 이루어온 땅, 우리들의 육친과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와 살과 땀이 녹아든 흙, 수많은 영혼들이 잠들어 쉬고 있는 성스러운 대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땅이 돈벌이의 도구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영토 확장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땅은 그 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꾸고 지킬 뿐이다.

1855년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현재의 워싱턴 주에 해당하는 땅을, 그곳에 살던 인디언 스와미족의 추장 시아틀에게 미국 정부에 팔라고 강요했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시아틀 추장이 미국 대통룡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 팔 수 있습니까?그와 같은 생각이 우리들에게는 매우 생소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공기의 신선함과 물의 거품조차 소유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구석구석은 나의 백성들에게는 신성한 것입니다. 저 빛나는 솔잎이며 모래톱이 있는 해변이며 어둠침침한 숲 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곤충들이 모두 내 백성들의 기억과 경험 안에서 성스럽습니다.

백인들이 우리의 사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 조각의 땅은 그 곁에 있는 땅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중에 와서 그 땅으로부터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약탈해가는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들에게 있어서 형제가 아니라 적입니다. 그 땅을 정복한 다음에도 그들은 전진을 계속합니다. 게걸스러운 그들의 식욕으로 그 땅을 먹고 나면 그 뒤에는 오로지 사막만이 남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하나의 조건을 내놓겠습니다. 짐승들이 없는 곳에서 인간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숲 속의 모든 짐승들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커다란 정신적인 외로움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인간에게도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은 여러분과 같은 신입니다. 그의 연민은 백인과 인디언들에게 한결같습니다. 이 땅은 그분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땅을 해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백인들 또한 소멸될 것입니다. 당신의 잠자리를 계속해서 오염시키면 당신은 언젠가 당신 자신의 쓰레기 안에서 숨이 막히게 될 것입니다.

들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들이 길들여지고 숲 속의 신성한 구석구석들이 인간들의 냄새로 손상된다면, 그것은 삶의 종말이며 죽음의 시작입니다.

마지막 인디언들이 이 땅으로부터 소멸되고 오직 광야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만 남을 때, 그때에도 이 해변과 숲들은 내 백성들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우리가 살던 땅을 넘겨준 후에 우리가 이 땅을 사랑하듯 사랑하고, 우리가 보살피듯 보살피면서 그것에 대한 기억을 당신 마음속에 간직하시오. 당신이 이 땅을 차지한 후 당신의 모든 힘과 능력과 마음으로써 당신의 자녀를 위해 보호하고 사랑하시오.

인디언 추장의 이 편지는 130여 년 전 그 시절의 미국 대통령만이 아니라, 자연을 말할 수 없이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보내온 묵시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생활은 생태계적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 인간의 행위가 곧 자연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행위는 다시 결과로써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런 현상이 인과의 법칙이고 우주 질서다.

이제 우리들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인간의 철저한 내적 변화만이 오늘의 파국을 극복할 수 있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의 맹목적이고 타성적인 생활습관에 일대 변화가 와야 한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것은 우리가 현재의 생활방식을 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이다.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현재의 생활방식은 역사적으로 볼 때 지극히 근래에 이루어진 일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 그것은 정복과 착취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과 동반의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옛말에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의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한다는 뜻이다.

오늘의 문명은 자연이 낳은 이자만으로는 모자라 자연이 쌓아둔 자본까지 갉아먹고 있는 비정한 실정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앓고 있는 오늘날 자연의 신음 소리는, 곧 우리들 자신의 질병이며 신음 소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하면서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물건은 지구상에 한정된 자원의 일부이며, 공장에서 기계와 기름과 화학약품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지나친 소비는 반드시 자연의 훼손과 환경의 오염을 가져온다.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 가전제품 한 가지, 가구 한 개를 만들어내는 데에 그만큼 매연과 산업 쓰레기와 더러운 물이 생긴다는 사실을 똑똑히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적게 가질수록 그것은 귀하게 여겨진다.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인간의 영역은 시든다.

끝으로 우리나라의 선인들이 자연과 어떤 교감을 이루며 살았는지, 한 편의 시조를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16세기 송순이 읊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보고 보리라.

  • 법정 스님 <맑고 향기롭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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