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이사야45.6ㄴ-8.21ㅁ-25.루카7.18ㄴ-23)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고,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자신도 부모가 처음인지라 아이가 예쁘다는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여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다 보니 너무 예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랍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 되어 많은 기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에게는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물질적인 풍요도 동생과 비교하면 많이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랑이라는 기대감이 너무 부담된다는 첫째의 하소연을 많이 듣습니다. 또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을 돌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고충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둘째 역시 힘듭니다. 첫째가 쓰던 것을 물려받고, 교육의 혜택도 첫째만큼 못 누립니다.
첫째든, 둘째든, 막내든, 외동이든지... 자기 자리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이 짊어질 무거운 짐 한 두가지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짐만이 보입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짐은 자기 짐보다 너무 가볍다고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가 있을까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칭호에 대해 의심하면서, 믿음에 대해 불필요한 감정의 소비라고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삶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를 주님께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라고 묻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에인카렘에서 만나셨을 때, 즉 뱃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그가 의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자기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늘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 완벽해 보이는 세례자 요한까지도 말이지요.
자기 짐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짐이 무겁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있으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내 곁에서 볼 수 없기에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의심을 품지 말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충격적이고 독특한 것을 주려고 애쓰지 마라. 그냥 따뜻하고 좋은 것을 주면 된다. 좋은 것만이 영원히 남는다(팀 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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