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1요한4.7-10.마르6.34-44)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도대체 왜? 이 큰 부끄러움은 항상 우리의 몫이어야 합니까?
오랜 세월 차곡차곡 공들여 쌓아 올린 국격이 처참히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이라는 표현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주 항공기 참사로 인한 범국민적 트라우마, 거기에다 전 세계 사람들 앞에 볼썽사나운 광경을 끝도 없이 연출하고 있는 악의 무리들...
어찌 그들은 그리도 부끄러움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인 제공자는 그들인데,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이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너무나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하루하루입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가련한 우리 민족을 굽어보시어, 이 혼란과 방황에서 조속히 해방시켜 주시기를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난감한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을 거듭해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 어쩌면 너무도 기막히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울부짖고 있는 오늘 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엄동설한에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위해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길거리에서 꼬박 밤을 지새웁니다. 대체 누구를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나,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목자가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는 거리의 양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성직자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은 양이면서, 동시에 목자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착한 목자가 없다며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슬아슬하면서도 엄중한 이 시국에 우리는 목자로서 이 시대와 나라와 양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을 거듭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착한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금쪽같은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 아닐까요? 착한 목자는 너무나도 당연히 양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 사이에 머무는 것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그는 언제나 양들 사이에 현존하기에, 몸에서는 늘 양 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착한 목자는 너무나도 당연히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양들 사이에, 나라를 위한 걱정이 태산인 거리의 백성들 사이에, 울부짖고 있는 민중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착한 목자는 기도만 열심히 하고 성경만 열심히 읽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양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와 눈동자를 마주침을 통해 그의 내면, 그의 영혼의 상태를 확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결국 사목자는 맡겨진 양들을 위해 발로 뛰는 사람, 양들 사이로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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