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1요한5.5-13.루카5.12-16)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며칠 전부터 스마트폰의 액정이 화면이 꺼지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액정의 화면이 아예 안 나오면 스마트폰 사용이 어렵습니다. 대리점엘 갔더니 삼성전자에서 지정해 준 수리 업체로 가라고 했습니다. 지정 업체로 갔더니 3주일은 걸린다고 했습니다. 스마트폰 없이 3주일 지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대리점에서 중고 휴대전화를 빌려주어서 심 카드를 바꿔서 임시로 사용했습니다. 이번에도 깜짝 놀라서 삼성전자에 다니는 형제에게 연락했습니다. 형제님은 저의 스마트폰을 가져가서 1시간 만에 수리해 주었습니다. 접히는 스마트폰은 접히는 부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다음에도 문제가 생기면 연락 달라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지난 대림 특강에서 신부님은 새로운 병을 이야기했습니다. ‘핸떨병’이라고 합니다.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지면 깨질 것 같아 걱정이고, 핸드폰을 잃어버릴까, 생각하면 또 걱정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핸드폰이 손에 떨어지는 건 걱정하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건 별로 걱정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고 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면서 떠오르는 상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별’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주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본 별은 어떤 별일까요? 그것은 희망의 별, 믿음의 별, 사랑의 별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본 별은 어떤 별일까요? 그것은 겸손의 별, 나눔의 별, 희생의 별입니다. 그런 별을 충실히 따르면 주님의 성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별은 어떤 별일까요? 그것은 권력의 별, 재물의 별, 명예의 별입니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별은 어떤 별일까요? 그것은 욕망의 별, 분노의 별, 질투의 별입니다. 그런 별을 따르면 바로 옆에서 주님의 성탄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구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구유에 누워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구유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누추한 곳입니다. 그곳은 가난한 이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곳은 굶주린 이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곳은 병든 이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 병든 이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찾는 구유는 어떤 곳일까요? 우리는 성공한 이, 권력을 잡은 이, 재물이 많이 이와 함께 하려 합니다. 그런 이와 함께 하려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 탄생의 구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곳으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공현을 대하는 복음서의 시각은 조금씩 다릅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 아들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전합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거슬러 가면 아담이 나오고,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 신학적인 의미를 담아서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14대라고 합니다. 다윗에서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라고 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예수님까지가 14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과 사건을 예수님의 족보에 넣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임금 다윗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바빌론의 유배를 견디고 예수님께서 태어났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서 5명의 여인을 넣었습니다.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타마르는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시아버지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도와 베들레헴에 정착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는 지혜로운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나병환자는 죄인 취급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가족들과도 함께 지낼 수 있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 품 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며,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에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참된 가치와 진실한 행복을 선택하기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잠시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양심과 영혼을 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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