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해 연중 제4주일
저는 어릴 적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경험하며 덕분에 ‘행복’이란 목표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두려웠던 죽음의 공포가 행복하니까 줄어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진복팔단, 곧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동물-인간-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각 존재는 자신이 행복이라 믿는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여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 이론입니다. 인간의 뇌는 이유(Why) - 방법(How) - 목적(What)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음의 영역이고, 방법은 이성의 영역이며 목적은 육체의 영역입니다. 사람에도 깊이가 있는데 동물과 같은 사람은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 영적인 사람은 이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유가 중요한데, 동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동물이라 믿습니다. 곧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나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왜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지, 내가 왜 슬퍼해야 하는지, 내가 왜 온유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당해야 하는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그저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상어는 사람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어는 그저 생존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기처럼 무조건 내 앞에 있는 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덥석 물어보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배를 채울 필요가 없거나 맛이 없으면 물었다가도 그냥 놓습니다. 만약 그런 존재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반드시 “나는 나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배만 곯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채워야 할 행복의 정도가 그저 동물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구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노숙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면 근처에 그분들이 거저 숙박을 할 수 있게 나라에서 만든 시설들이 존재합니다. 거기 가면 이슬을 맞지 않아도 되고 따듯한 물도 나와서 몸도 씻고 빨래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밖에서 얼어 죽을망정 그곳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일까요? 나의 자유를 침해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인데 타인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지만 않는다면 밖에서 떨면서 자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노숙자로 살면서 살기 힘들고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분들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누구의 아빠”, “나는 누구의 남편”, “나는 누구의 딸”이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이유(why)가 나가 아니라 타인이 되어버린 결과입니다. 타인이 자신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 안에 들어오려면 그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내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나는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저는 부모의 굳은 살을 보면서 내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녀로 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부모의 마음이 아픈 것을 보면 나도 행복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인간의 행복 정도에 오릅니다.
행복은 이제 생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누군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하지만 나만을 만족시키던 동물적 행복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이 먹고 마시고 돈이나 명예욕으로 살아가는 동물적 인간을 볼 때는 불쌍함을 느낍니다.
7조 원의 재산을 모았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 받은 한룽 그룹 류한 회장은 다시 태어나면 그저 가족과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죽기 전에 비로소 가족의 행복이 동물처럼 생존을 위한 행복만을 좇을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만약 세속-육신-마귀의 욕망 추구가 행복이라 여기는 이가 있다면 아직 동물적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가족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정이’(2023)에서 내용 상 안타까운 것은 딸이 사이보그 엄마를 풀어줄 때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존재는 “나는 나”로 살아갑니다. 생존만이 행복이고 돈과 음식과 힘만이 행복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보그 엄마는 죽더라도 딸을 위해 싸울 때가 더 행복했습니다. 딸은 엄마에게 그 행복의 가능성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행복하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동물보다 더 뜨거운 가족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자녀 행복의 수준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실 나의 ‘이유’(why)를 다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이 나를 존재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다시 눈을 만들어주고 생명을 되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동차의 존재 이유가 자동차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부모도 존재하게 만든 창조자가 나의 존재 이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바꿔주러 오셨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살과 피가 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하는 성체가 바로 하느님의 피 흘림임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거하게 되시고 이제 나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하느님만 있으면 되니 이 세상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슬퍼집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인데 하느님의 자녀 수준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고 다른 수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 믿지도 않고 그저 인간으로, 혹은 동물로 살아감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온유합니다. 자기 힘으로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하거나 화낼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로움에 주립니다. 오직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움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자비롭습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또한 마음이 깨끗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됩니다. 세상의 생존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해를 받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 자기를 나라고 하고 누구의 자녀나 남편이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하느님이라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교만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나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권에 당첨되어 이제 돈을 바꾸기만 하면 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것만 대답해주십시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행복은 우리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 믿음이 내가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지 알려줄 것이고 무엇을(what)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삶이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시작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사는지 생각해봅시다. 나를 기쁘게?, 가족을 기쁘게?, 하느님을 기쁘게? 이것이 나의 행복 정도를 말해줄 것입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강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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