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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堂-감사 찬미 제사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말라3.1-4.루카2.22-40)

어느 책을 읽다가 여검사의 초임 검사 때의 경험을 읽게 되었습니다. 초임 검사 때이니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할까요? 그런데 조사받는 사람이 이 여검사를 향해 계속해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 불쾌해서 “아가씨라뇨!”라고 짜증 섞인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조사받는 사람이 “아! 그러면 아줌마입니까?”라고 반문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검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검사로 보이지 않으니, ‘검사’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인데 짜증을 냈던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듣고 싶은 소리가 있고, 또 듣기 싫은 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갖춰야 했습니다.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그런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짜증 내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칭찬, 사랑, 기쁨, 행복의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그 말을 하고, 그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부끄러운 모습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에 주님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실 때,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0-32)라고 찬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아마 아기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정답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또 한나 예언자 역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보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했기에, 실제로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먼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고, 보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내가 먼저 보고 싶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주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그에 걸맞게 생활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적합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만나겠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지극히 부끄러운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

인간은 운명의 포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의 포로일 뿐이다(프랭클린 D.루스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