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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2023년 가해 연중 제4주간 금요일

2023년 가해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죄책감을 인간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이유>

 

복음: 마르코 6,14-29

많은 심리 프로그램에서 어렸을 때의 죄책감을 잊고 새롭게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그러나 죄책감을 자기 힘으로 없앨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책감도 인간의 능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없애는 힘도 인간에겐 없습니다. 

 

영화 ‘타임머신’(2002)에서 남자 주인공은 애인에게 청혼할 때 강도에 의해 애인이 총에 맞아 죽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애인을 살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타임머신을 만들어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빨리 장소를 이동해 애인이 강도를 만나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차에 치여 죽습니다. 계속 과거로 돌아가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애인은 죽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인간이 하려는 노력이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운명’입니다. 이 운명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 하느님의 영역인 것입니다.

 

죄책감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양심에 의해 발생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을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이미 발생한 사건을 없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지난 50년간 모은 130톤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24시간을 홀로 지내는 할머니 사연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7번이나 당하고도 여전히 위험천만한 8차선 도로에서 파지를 줍습니다. 파지를 가득 실은 할머니가 향한 곳은, 어마어마한 쓰레기 담벼락 앞입니다. 할머니가 쌓은 쓰레기 담은 자그마치 길이 65미터, 높이 1미터 62센티에 달했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쌓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심지어 거대 쓰레기 담을 지나 들어간 할머니의 집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도 겨우 드나들 정도로 비좁습니다. 게다가 집 안은 오래 방치된 폐지와 쓰레기들이 썩어 악취와 오물들로 도저히 생활할 수 없어 보입니다.

 

대체 할머니는 왜 이토록 쓰레기에 집착하시는 걸까요? 할머니에게는 딸이 있습니다. 매일 전화도 합니다. 그러나 딸을 따라나서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왜 한사코 쓰레기로 묻힌 집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할머니는 본래 부자였다고 합니다. 자신은 편하게 컸는데, 딸을 키울 때는 매우 어려워진 것입니다. 할머니에게 딸을 부유하게 키우지 못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주워 모으면 언젠가 가격이 오르면 팔아서 딸에게 못다 한 책임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할머니가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딸을 고생시키며 키운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법 싶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죄책감을 없애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작진은 130톤의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주겠다고 말합니다. 쓰레기는 할머니가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50년간 모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번에 치워줄 수 있다고 말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능력이 있는 이가 죄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능력이 있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르 6,14)라고 말합니다. 그는 기적이 있으신 분께 무릎을 꿇을 겸손함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요한을 죽인 죄책감을 스스로의 믿음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하시는 분께 그 죄책감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청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해성사 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자신은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해 달라는 식의 예절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자존심이 죽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려는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축구공으로 커다란 학교 현관문을 깨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반 선생님은 저희 가정의 처지를 알고는 아이들에게 돈 50원씩 가져오라고 하고 당신이 얼마를 보태서 그 문의 수리비를 보상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문을 깨 먹은 죄책감을 더는 갖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모든 죄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은 몰라도 인간은 자신이 준 그 피해를 온전히 보상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드님까지도 죗값으로 지불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죄가 없다고 하시고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우리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죄책감도 믿음입니다. 믿음의 영역은 믿음으로만 상쇄됩니다. 하느님만이 인간의 모든 죄를 없이 하실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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