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창세2.7-9:3.1-7.로마5.12-19.마태4.1-11)
나쁜 것이 실은 좋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우리 교회는 언제부터 유혹에 약해졌을까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국교로 선언하고부터라고 합니다. 끔찍했던 박해상황에서 절대 권력의 비호를 받자 승리감에 도취했을까요? 봉사 직분이 권력화되고 성직자들의 재산축적 등이 문제가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식생활의 탐식, 고위성직자들은 제후들의 복색을 흉내 내고 세속의 가치관에 따라 승리를 구가합니다. 악마의 수법이 저절로 먹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느 정도 박해가 있어야 건강하다는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 스스로 일종의 박해상황을 연출하는 겁니다. 악마의 광야로 예수님을 내몬 것은 사탄이 아니라 성령이었습니다.
1. 유혹에 기죽지 말자
예수님도 유혹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유혹은 진저리나고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유혹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유혹을 통해 튼튼해질 수도 있습니다. 나약한 자신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유혹 속에 빠져,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뜻밖에도 따뜻하고 인간적입니다. ‘너는 사십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 이젠 건강을 돌봐야 한다. 넌 충분히 먹을 자격이 있다.’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냐고 너스레를 떱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능력도 있습니다. 거룩한 도성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 영적 세속성(공명심)으로 한껏 부풀립니다. 또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 권세와 재물을 거머쥐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칩니다.
2. 양날의 칼인 말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유혹도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확실한 무기입니다. 그렇다고 그저 도구나 수단이 아닙니다. 말씀은 절개(節槪)를 지켜 받들어야 할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당신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하십니다. 사십일을 굶었지만,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님의 기개(氣槪)가 놀랍습니다. 말씀은 양날의 칼입니다. 사탄을 베어내기 전에 내가 베어져 나가도 좋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죽어야만 사는 이치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말씀을 이해하는 정도로는 안 되나 봅니다. 악마도 그 정도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 땐, 아예 말씀을 들어 주님을 유혹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거나 누구를 공격해선 안 됩니다. 그건 악마의 수법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다소곳이 우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저는 성경(토라)을 일곱 번 꿰뚫어 읽었습니다.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스승이 답합니다. “그럼 성경(토라)이 너를 몇 번이나 꿰뚫어 읽었느냐? 히브리서는 말씀의 실체를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리 4, 12)
관절과 골수를 가른다는 말씀이 무섭습니다. 가슴을 치는 정도로는 어림없나 봅니다. 말씀 앞에선 벌거벗겨지고 속셈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날이 바짝 선 말씀 앞에 서 계십니다. 광야는 장소라기보다는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광야의 시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욕망 속에 숨어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나쁜 것이 실은 좋은 것이다.’ 그리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사탄이 꼼짝 못 하겠지요. 은총의 사순 시기이길 빕니다.
- 서춘배 신부(의정부교구 병원사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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