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은 자유롭다 >
우리 형제자매들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하여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전념하고, 자유로룬 가난을 통해서 사랑과 복종을 실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체를 지극히 사랑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루의 첫걸음을 예수와 함께 시작하고, 해넘이가 되어 돌아오면 성체 성사에 참석하여 예수의 면전에서 미사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을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일에 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흠모의 시간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미사 시간은 하느님이 공동체를 주시는 가장 훌륭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드림으로써 가까운 사이기 됩니다. 우리는 미사를 드림으로써 서로 더욱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미사를 드림으로써 더욱 깊은 신심과 더욱 벅찬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수녀들이 하느님의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나는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극진히 돌보고 우리의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준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미소가 떠오릅니다.
나는 하느님이 주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주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이 부자를 극진히 섬길 때, 가난한 사람들을 극진히 섬기는 모임을 적어도 하나 만드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나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풀이하시기 전에, 여덟 가지 福을 제시하시기 전에,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양식을 주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하신 뒤에야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와 똑같이 하셨습니다. 예수가 그녀의 생애에 들어오시던 순간, 곧 그녀가 최초로 성체를 받아 모시던 순간, 그녀는 서둘러 달려가서 엘리사벳을 섬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녀는 주님의 여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새내기 수녀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나는 젊은이들로부터, 그리고 이곳 미국에 있는 여러분의 자녀들로부터도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달 동안에만 젊은이를 열다섯 명 이상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젊은이가 내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소녀였습니다.
"나는 그곳을 소망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나를 택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싶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갖고 있는 바람을 그들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그들과 합류한다면, 나는 잃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자기포기를 사랑합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가난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난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난은 우리가 택한 결과입니다. 내가 자유로운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할 자유가 있습니다.
성 요한이 말한 대로,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가족에게 눈을 돌립시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 우리 가정의 빈곤, 우리 공동체의 빈곤을 정말로 아십니까?
나는 우리 공동체의 수녀들에게 미소 짓지 않을 때가 간혹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소 짓는 것은 자기 식구에게 미소 짓는 것보다 쉽습니다.
- 聖女 마더 데레사의 <가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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