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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향 가는길

"죽음 성찰해야 의미있는 삶 산다 "

"죽음 성찰해야 의미있는 삶 산다 "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 '죽음과의 만남-누구나 가야할 길' 세미나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관구장 장현권 수사)는 한국 진출 50주년을 맞아 10월 28일 광주시 5ㆍ18기념문화센터에서 '죽음과의 만남-누구나 가야할 길'이라는 주제로 기념 세미나를 열고 다양한 관점에서 죽음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장현권 수사는 인사말에서 "숨이 멎은 상태가 죽음이라는 기준은 인간이 정한 기호일 뿐"이라며 "행복과 불행이 우리 마음에 달린 것처럼 죽음과 살아있음에 대한 기준 또한 우리 인식과 믿음 안에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세미나 주요 발표 내용을 요약한다.

▨죽음의 인류학적 이해(김경학 교수, 전남대 인류학과)

 인류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죽음 관련 주제는 죽음에 대처하는 사람들과,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의례적 측면들이다.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닌 살아있는 자와 살아있는 자의 세계이다.

꿈에 등장하는 죽은 자의 이미지, 죽음으로 인해 느슨해진 공동체 결속과 살아있는 자의 고통, 죽음으로 인한 삶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의 세계에 관여한다는 인식 등 죽음이 문제가 됐던 것은 항상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에서였다.

 살아있는 자들은 다양한 방식의 죽음의례를 통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두려움과 상처, 상실 등 문제를 순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죽음의례의 바탕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전이적 단계를 거쳐 다른 세계로 서서히 옮겨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인류학자들은 전이적 과정에 등장하는 의례적 관습과 믿음의 문화적 맥락을 규명하고, 그 다양성 및 상대성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인류학자들은 죽음을 단순한 의과학의 영역이 아닌 종교적 영역으로 간주했다. 다른 문화부문에 비해 종교적 영역의 변화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다. 그러나 사회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죽음의례와 관련된 관습과 믿음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죽음에 대한 의료 윤리적 이해-안락사를 중심으로(정미경 가정의학전문의, 전진상클리닉)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된다면 사회가 안락사의 자발성을 살릴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자발성은 강제, 압력, 과도한 권유, 심리적ㆍ정서적 조종 등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한다.

비록 안락사가 복잡한 절차를 거쳐 시행된다 하더라도 안락사를 요청하도록 교묘히 조종당하는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장치는 없다.

 늙고 병들어 타인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은 죽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죽어야 할 의무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환자가 고통 없이 죽고 싶어하는데도 그들을 계속 고통 속에 두는 것은 비인간적이기에 안락사가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의 전제는 안락사만이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신 완화의학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춘다면 안락사가 아니어도 극심한 고통은 줄일 수 있다. 의사와 간호사에 대한 완화의학 교육이 필요하다.

 환자들이 진심으로 안락사를 요구하는 일은 흔치 않다.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 대부분은 실제로 '도움을 청하는 울부짖음'(crying for help)을 그렇게 표현할 뿐이다.

 안락사를 합법화하기에는 우리 사회에 잠재적 인종차별,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공리주의적 무감각, 인간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너무 뚜렷하다. 자발적 안락사일지라도 안락사를 금지하는 법이 유지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이들은 안락사가 허용되도 남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이토록 위험한 실험을 시도해서는 안된다.

▨죽음에 대한 인간학적 성찰(신승환 교수, 가톨릭대 철학과)

 인간은 영원한 삶, 죽음 없는 삶을 원하지만 그것은 공허하기 그지없는 생각일 뿐이다. 삶의 맥락을 상실한 채 끝없이 이어지는 생물적 생명이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며, 공허에 직면하게 하는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삶을 절대화하고 죽음을 피해야 할 악의 원천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이해가 우리 삶을 결정한다면 의미있는 삶을 위해 우리는 다시금 진지하게 죽음을 앞당겨 생각하고, 죽음을 성찰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성찰과 이해가 없다면 삶의 의미는 그만큼 축소될 것이다. 죽음에의 거부나 은폐, 왜곡은 삶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삶과 죽음은 인간 삶에 결정적으로 연결된 한 축의 두 원점이다.

 죽음은 인간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다.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며, 검증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성찰은 과학의 영역이나 인식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초월적 영역에서 주어진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묻는 물음의 근거가 된다. 죽음에의 태도에 따라 현재 삶에 대한 이해는 물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죽음이란 결국 인간을 무로 돌려버리거나 아니면 또 다른 삶으로 초대하는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수용의 태도를 촉구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궁극적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 평화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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