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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곰삭한 맛

<기도> ㅡ 구상 시 모음

<기도> ㅡ 구상 시 모음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어른 세상>

네 꼬라지에 어줍잖게

그리 생각에 잠겨 있느냐고

비웃지 말라.

내가 기가 차고 어안이벙벙해서

말문마저 막히는 것은

글쎄, 저 글쎄 말이다.

이른바 어른들이 벌리고 있는

이 세상살이라는 게, 그 모조리

거짓에 차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정의를 외치며 불의를 행하고

저들은 사랑을 입담으며 서로 미워하고

저들은 평화를 내걸고 싸우며 죽인다.

내가 주제넘어 몹시 저어되지만

어느 분의 말씀을 빌려 한마디 하자면

저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지 않고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듯이

저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지 않고선

이 거짓세상의 그 덫과 수렁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초토(焦土)의 시·8>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거듭남>

저 성현들이 쳐드신 바

어린이 마음을

지각(知覺) 이전의 상태로

너희는 오해하지들 마라!

그런 미숙(未熟)의 유치란

본능적 충동에 사로잡히거나

독선과 편협을 일삼게 되느니,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린이 마음이란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자기가 자신에게 이김으로써

이른바 '거듭남'에서 오는

순진이요, 단순이요,

소박한 것이다.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오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날개>

내가 걸음마를 떼면서

최초에 느낀 것은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제 칠순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느끼는 것도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손길을 향하여

기우뚱대며 발걸음을 옮기던 때나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에 매달려

어찌 어찌 살아가는 이제나

내가 바라고 그리는 것은

'제트'기도 아니요,

우주선도 아니요,

마치 털벌레가 나비가 되듯

바로 내가 날개를 달고

온 누리의 성좌(星座)를 꽃동산 삼아

첫사랑 어울려 훨훨 날으는

그 황홀이다.

 

<네 마음에다>

요즘 멀쩡한 사람들 헛소리에

너나없이 놀아날까 두렵다.

길은 장님에게 물어라.

해답은 벙어리에게 들으라.

시비는 귀머거리에게서 밝히라.

진실은 바보에게서 구하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길은 네 마음에다 물어라.

해답은 네 마음에서 들으라.

시비는 네 마음에서 밝히라.

진실은 네 마음에다 구하라.

시(詩)

우리가 평소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이 아무리 말을 치장해도

그 말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느니

하물며 시의 표상(表象)이

아무리 현란한들

그 실재(實在)가 없고서야

어찌 감동을 주랴?

흔히 말과 생각을 다른 것으로 아나

실상 생각과 느낌은 말로써 하느니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렷다.

그리고 이웃집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도

누구나 그 주인보다

더 맛볼 수 있듯이

또한 길섶에 자란

잡초의 짓밟힘에도

가여워 눈물짓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시는 우주적 감각*과

그 연민(憐憫)에서

태어나고 빚어지고

써지는 것이니

시를 소유나

이해(利害)의 굴레 안에서

찾거나 얻거나

쓰려고 들지 말라!

오오, 말씀의 신령함이여!

* 하이데거의 "언어와 사고"에서의 말.

* 폴 발레리의 시에 대한 정의.

 

<시심>

내가 달마다 이 연작에다가

허전스런 이야기를 고르다시피 하여

시라고 써내니까

젊은 시인 하나가 하도 이상했던지

"그러면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겠네요"하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정녕, 하나도 없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다가 시다.

아니, 사람 누구에게나

또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에는

진·선·미가 깃들어 있다.

죄 많은 곳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듯이 말이다.*

그것을 찾아내서

마치 어린애처럼

맞보고 누리는 것이

시인이다.

* 성서의 로마서 5장 20절

 

<홀로와 더불어>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白 蓮>

내 가슴 무너진 터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솟아난 백련 한 떨기

사막인 듯 메마른 나의 마음에다

어쩌자고 꽃망울 맺어 놓고야

이제 더 피울래야

피울 길 없는 백련 한 송이

왼 밤 내 꼬박 새어 지켜도

너를 가리울 담장은 없고

선머슴들이 너를 꺾어 간다손

나는 냉가슴 앓는 벙어리 될 뿐

오가는 길손들이 너를 탐내

송두리째 떠간다 한 들

막을래야 막을 길 없는

내 마음의 망울진 백련 한 송이

차라리 솟지야 않았던 들

세상없는 꽃에도 무심한 것을

너를 가깝게 멀리 바랠 때 마다

퉁퉁 부어오르는 영혼의 눈시울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혼자 논다>

이웃집 소녀가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 갔을 무렵

하루는 나를 보고

ㅡ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

그러길래

ㅡ 유명이 무엇인데?

하였더니

ㅡ 몰라!

란다. 그래 나는

ㅡ 그거 안좋은 거야!

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ㅡ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하고 물었더니

ㅡ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ㅡ 잘 했어! 고마워!

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

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구상 具常 (1919 - 2004)

본명 : 구상준(具常浚)

세례명 : 요한

출생 : 1919년 9월 16일

학력 : 일본 니혼대학교

약력 : 1942년 북선매일신문 기자

1952년 효성여자대학교 부교수

1960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1985년 문예진흥원 이사

1997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2004년 5월 11일 폐질환으로 별세

 

시집 『구상시집』(청구출판사, 1951), 『초토의 시』(청구출판사, 1956), 『까마귀』(흥성사, 1981),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큰손, 1982), 『드레퓌스의 벤취에서』(고려원, 1984),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현대문학사, 1984), 『구상연작시집』(시문학사, 1985), 『구상시전집』(서문당,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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