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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김수환 추기경

<너 어디 있느냐?>​

<너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 중에서 아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물음은 창세기3장 9절에 나오는 말로서 인류의 원조 아담이 하느님의 명을 거스르고 범죄한 다음 부끄럽고 두려워 하느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어 있었을 때, 하느님이 그를 찾으시며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말씀입니다.

이 물음은 한편 잘못을 문책하는 물음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고 숨어 있는 아담을 구하시고자 하느님이 찾고 부르시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 숨어 있다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아담은 영영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 것이요, 그러면 영영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 어디 있느냐?"는 죄에 대한 문책이면서 동시에 구하시고자 하는 자비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 무언가 잘못했습니다. 누구랑 싸웠다든지 그래서 새 옷을 망쳐 버렸다든지, 아니면 부모님이 시키시는 심부름을 하지 않았다든지 해서 집에 들어가자니 아버지한테 꾸중을 들을 것 같으니까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밖에 숨다시피 몸을 움츠리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아버지는 걱정이 되어 드디어 찾아 나서십니다. "얘야, 너 어디 있느냐?" 이렇 때, 우리는 잘못한 행동 때문에 회초리도 얻어맞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만 벌을 주기 위해서 찾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고 응당 거기에 대한 벌을 주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밖에 그대로 버려 둘 수는 없으니 그에게 밥도 주고 암만해도 자식은 자식이니 그를 자식으로 품안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찾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느님이 아담을 부르며 "너 어디 있느냐?"고 찾고 물으실 때에도 문책과 자비가 함께 있고, 또 결국은 구원하시는 데 더 큰 뜻이 있으니 자비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도 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물음은 이미 창세기에서 볼 수 있듯이 어디 있는지 물리적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의 아무도 자기는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한 번도 한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 즉 죄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나는 지금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물음에 더 깊이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지금 윤리적으로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면서 동시에 어떤 가치관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도 됩니다. 다시 말해 인생 좌표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인생길을 바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런 뜻으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을 모를 경우, 우리는 잘못하면 인생 자체를 아주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길을 흔히 인생 항로라고 합니다. 험한 바다를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항구를 목적하여 가는 배와 같다는 뜻이겠지요. 배가 목적하는 항구에 잘 도착하려면, 악천후와 싸우면서 항로 중에 배의 위치가 어딘지 계속 체크해야 합니다.

인생길도 같습니다. 인생을 되는 대로 살겠다고 작정했으면 모르되, 무언가 올바르게, 값지게 살려고 한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쯤은 아니, 자주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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