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분, 하느님의 말씀>
독일 아헨(Auchen)에 갔을 때였습니다.
그날 저는 아헨에 있는 미씨오(Missio)라는
교회 기관에 있는 분들을 만나서
그분들과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기차편으로
브룩셀(Bruxelles)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스토랑의 식사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점심시간이 늦어지고 따라서 기차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브룩셀에 닿아야 했기 때문에 다음 기차 시간이
몇 시인가에 대해 식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
자기와 식사를 함께하는 사람이 바로 브룩셀 사람인데
점심 식사가 끝나는 대로 자동차편으로 떠나니
혹시 원하시면 함께 가셔도 좋다고 제의해 왔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러는 편이 빠를 것 같아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 식사 후에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차를 몰고 가면서 자기 차에 "추기경을 모신 것은
처음 있는 영광이다"라고 하면서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흑인이었는데 본래 가톨릭 집안에서 났고,
11남매 중 둘은 신부가 되었고, 누나 하나는 수녀인데
자기는 약 10년 전부터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유를 물으니 교회가 너무 보수적이고
현대의 감각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엇이 그렇게 보수적이냐고 물었더니
예를 들면, 산아 제한 문제에 있어서
교회는 너무 완고하며 결혼 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은 계속 세 시간 가까이 걸리는
여행 중에 날씨나 한국 이야기 외에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의미,
사랑, 고통, 죽음 등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불어밖에 몰랐고 저는 불어가 아주 서툰데다가
질문도 대답하기 곤란할 만큼 어렵고 중요해서
시원한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럭저럭 이야기를 하다가
브룩셀에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그와 작별할 시간도 다 된 것 같아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먼저, 오늘 나를 이렇게 태워주어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는
이제 얼마 안 가면 도착하게 되고,
그러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당신이 오늘 나를 믿고 물은 여러 가지 인생에 관한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기 위해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오늘 던진 그런 질문들,
당신이 아마도 늘 지니고 있는 그런 문제에 대한 답을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런 문제에 대한 답을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오늘날 최고로 발전하여 우주여행까지 하게 된
자연 과학이 답을 준다고 보는가?"
그는 더욱 힘있게 "절대로 아니다."
"그럼 당신이 버는 돈이 답인가?"
그는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저는 "그러면 성경은 어떤가?
성경을 당신이 읽는다면 그 속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금방 얻지 못할지도 모르나 차차 그런 문제를 밝혀 주는
빛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는가?"
그 사람은 이 질문에 한참 생각하다가
신중하게 "그럴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저는
"당신이 오늘 나에게 차편를 제공해 준 데 대해서
감사하는 뜻으로 권하고 싶다.
당신이 성당에 가든지 안가든지 그것은 당신 자유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그래도 빛 속에 살기를 원한다면
매일 10분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좋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도움이 되는 권고를 받은 듯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말에는 쓸데없는 말과 유익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을 해치는 말, 인간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좌절과 실망에서 일으키는 말,
말의 힘은 이렇게 큽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은 더 큰 힘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생명 자체, 빛이신 분,
그분의 말씀은 이 사랑과 생명, 빛을 줍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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