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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人의 삶

종교가 이 시대에도 희망이 되려면 1

종교가 이 시대에도 희망이 되려면 1

요즘 같은 시대에 뭐라도 해 보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종교가 이 시대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설득하겠다 하니 지인들로부터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왔다. 대충 이런 반응이었다. ‘뭐 새삼스레 그러느냐 그냥 조용히 살아!’ ‘잘될 것 같지는 않은데 네가 하겠다 하니 응원은 해 주겠다!’ ‘애쓴다!’ 예상한 대로였다.

종교에 대한 냉소와 비관

그동안 종교인의 한 사람, 한 종단의 신학자로 살아오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종교인 스스로 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원인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서 비롯하는지 아니면 다른 종교인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 만날 종교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답을 찾아볼 생각이다.

내가 어렴풋이 짐작하는 원인은 종교에 대한 ‘냉소와 비관’이 아닐까 싶다. 어떤 이는 이 상태를 ‘달관’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종교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다 믿는 것은 미련이니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인생이나 잘 사는 게 답이라 생각하는 태도 말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해 볼 만큼 해 보다 하는 소리니 여기에도 진실은 담겨 있다.

코로나 펜데믹을 거치며 많은 종교인이 무력감에 빠져 있다. 이 무력감은 팬데믹 이전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신자들이 계속 이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팬데믹 때는 이 무력감이 더 컸다.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팬데믹이 사실상 종식된 지금도 이 무력감을 떨치기 어렵다.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곤 하나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다음 시기가 본격적인 하락기(혹은 쇠퇴기)의 시작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 양적 지표로 보면 제도 종교는 확실히 쇠퇴의 길에 들어선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종교인이 이렇게 되는 원인을 모르는 것 같진 않다. 그런데 답을 찾을 수 없고 뭐라도 해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인 상황을 계속 겪다 보니 그리 된 것 같다. 사실 교세가 폭증하던 시기에도 종교인이 무엇을 해서 그런 호사를 누린 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자들이 쏟아져 들어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다시 쏟아져 나가고 있다. 결과를 보고 해석은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지만 사실 그리 들어오고 나가는 원인을 정확히 알긴 어렵다. 결국 상황은 주어지는 것일 뿐 내가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요즘 종교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냉소와 비관을 넘어

나는 누구보다 종교를 잘 아는 축에 속하는데 왜 종교인으로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나 또한 살아오면서 여러 번 실망하고 절망했다. 그럼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온갖 실망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교를 떠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종교가 갖는 힘을 더 신뢰하게 된다. 나의 소속이 가톨릭이니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더 강해진다.

역설이지만 나이가 들어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허무할 때도 종교는 이런 허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의미체계(meaning system)다. 하느님을 배제하고라도 선배 신앙인들의 풍부한 경험에서 그래도 종교가 제시하는 가치와 삶이 인생을 가장 풍요롭게 사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인생 뭐 있어?’ 사실 별것 없다. 그래서 이 인생의 방향과 좌표를 설정하는 경험적 진리인 종교가 의지처가 될 수 있다.

어느 순간 이를 알고 나니 종교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눈길이 덜 간다. 오히려 종교가 간직해 온 보물을 발굴하고 이를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더 마음을 쓰게 된다. 나한테는 확실히 종교가 오래된 새길이다.

사실 길은 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해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오래된 보물을 지금 이 시대에도 다수가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가 동시대인에게 호소력을 가지려면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당인히 으뜸 매력은 종교인이 삶에서 보이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리 멋지게 살 수 있는가? 알고 보니 신앙인이었네!’ 이게 매력이다. 그러나 이런 매력적인 삶을 살기 이전에 이 삶이 멋지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삶이 즐거워야 한다.

모든 것이 다 막힌 듯 보이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작은 희망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매 순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요즘 신자들이 보여야 할 모습이다. 이렇게 해도 될까 말까인데 냉소와 비관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 교회, 세상의 변화는 참으로 더디다. 그래서 지치고 실망하기 쉽다.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그 길을 가는 인생만큼 멋진 삶은 없다. 적어도 내가 그동안 공부하고 봐 온 바로는 그렇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 요즘 종교인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다.

박문수

가톨릭 신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