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信仰人의 삶

종교가 이 시대에도 희망이 되려면 2

종교가 이 시대에도 희망이 되려면 2

‘풍선 효과’라는 말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풍선 한끝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푼다. 가운데를 누르면 양쪽이 다 부푼다. 풍선이 터지지 않는 한, 공기의 양이 달라지지 않는 한 어느 한쪽이 눌리면 반드시 다른 쪽이 부푼다.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흔하다. 일정한 수요가 있는데 이를 어느 한쪽에서 억압하면 사라지지 않고 다른 쪽으로 혹은 다른 방식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이런 것이다. 한국 종교에도 이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

종교 수요는 일정하다

한국 종교를 연구하다 보면 이해가 어려운 현상이 하나 있다. 한국은 종교 자유가 있는 나라임에도 종교인구가 절반이나 그 이하밖에 되지 않는 현상이다.

알다시피 종교 자유가 있는 나라의 종교인구는 대체로 90퍼센트 이상이다. 한국처럼 종교 현상은 늘 눈에 띄는데 막상 종교인구를 조사하면 인구의 절반 이하만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여기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한국에서 종교인구를 조사하는 방법이 다른 나라와 달라서다. 한국에서는 종교인구를 조사할 때 개신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와 기타 종교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게 한다. 이슬람교는 교세에서 원불교와 비슷하거나 앞서고 있음에도 선택지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큰 제도종교 외에도 불가지론(agnosticism), 무신론, 자국에 고유한 종교, 기타 여러 종교가 선택지에 들어간다. 다른 나라처럼 선택지를 만든다면 한국에서는 무교(巫敎), 다양한 민족 종교가 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기준을 적용하면 한국의 종교인구는 적어도 90퍼센트 이상 되지 않을까 싶다.

둘째, 한국인이 잘 제도화된 종교만 종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서다. 이는 첫째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따르면 무교는 종교 범주에 들지 않는다. 유교 왕조, 일제 강점기, 친미 개신교 정권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 동안 무교는 남 앞에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종교였다.

점복(占卜)이 일상일 만큼 무교 수요가 한국 사회에 넘치고 있음에도 이들은 종교인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필자는 늘 농담처럼 “한국에는 두 가지 종교만 있을 뿐이다. 남에게 떳떳이 밝힐 수 있는 종교와 밝힐 수 없는 종교다”라고 말해 왔다.

제도 종교는 밝힐 수 있는 종교, 제도 종교지만 신자 스스로 정당성을 결여했다고 느끼거나 타인에게 그런 평가를 받는 경우와 무교처럼 제도화가 덜 돼 있고 사회에서 미신(迷信)으로 간주돼 온 종교가 밝힐 수 없는 종교다.

이렇게 보면 한국 종교인구는 적지 않다. 한국에서 종교 수요는 차고 넘친다. 한동안 한국인이 기존 종교인구 조사 방식에서 ‘밝힐 수 있는 종교’에 마음을 두었다 다시 거두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거둔 마음이 다른 데로 이미 이동하였거나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종교 수요는 일정하고 시대 상황에 따라 종교가 어떻게 상황을 정의하고 그에 상응하는 답을 제공하느냐에 따라 부풀거나 줄어든 데가 있을 뿐이다.

종교에서도 풍선 효과가 나타나는 셈이다. 이 가설을 따르면 영성의 시대라 할 만큼 영성에 대한 관심은 높은데 제도 종교 인구는 줄어드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종교 수요의 크기는 공급자가 결정한다

종교 수요는 자기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종교, 유사 종교 쪽으로 움직인다. 제도 종교가 이 역할에 충실하면 다른 종교 교세가 쪼그라든다. 만일 제도 종교가 이 역할에 불충실하거나 기능이 약화하면 다른 종교가 커진다.

영성의 시대에는 유사 종교가 기성 종교의 대체재로 기능한다. 심리, 의료 영역도 이런 유형의 대체제다. 이렇게 공급자가 종교 수요를 결정하는 것이다. 수요자는 시장의 소비자처럼 공급되는 종교 상품을 보고 소비 여부를 결정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소비자는 상품을 결정하고, 공급자는 소비자가 구매할 만한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소비 범위를 결정한다. 이런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종교시장이다. 이렇게 종교시장은 공급자가 경쟁하는 곳이다.

종교 수요는 공급자인 종교가 결정한다

이런 시장의 원리를 잘 아는 종교들은 신도를 거의 잃지 않거나 심지어 모았다. 신도의 대량 이탈을 경험한 종교들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거나 손절당했다. 이 현상을 뒤집어 이해하면 기성 종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종교 수요가 창출될 수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천주교를 예로 들어 본다. 신자들은 천주교 신자라는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같은 미사에 참례한다. 그런데 이들의 욕구는 다양하다. 연령, 계층, 관심사, 신앙관도 다양하다. 이에 비해 강론과 의식은 한 가지뿐이다. 간신히 주일학교, 청년 미사를 분리하긴 하였으나 성인 신자에게는 이런 관심과 배려가 부족하다. 이런 상황임에도 공급 측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소비자의 냉담이 일어났다.

다양화된 욕구에 단일한 공급이 냉담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개신교 대형 교회가 현재와 같은 신도 이탈 국면에서 덜 영향을 받는 경우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규모의 경제가 서비스 다양화를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도 종교는 이런 사태에 대한 해법을 가지고 있다. 자원도 모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요즘 고전할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안일한 게 일차 원인이다. 신자들의 마음을 읽는 데 너무 소홀하기 때문이다.

‘잡은 고기에게는 모이를 주지 않는 법’이라는 말이 이러한 태도와 잘 어울린다. 잡은 고기, 집토끼는 가만히 놔 둬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안일한 태도가 이탈로 이어지는 셈이다. 이런 이탈자를 대신 유사 종교들이 끌어가고 있다.

이런 유사 종교들은 더 적은 비용과 수고로 더 높은 만족과 효능을 줄 것이라 선전한다. 결국 이런 약속이 허망하다는 것이 이내 드러나지만 소비자는 자기 마음을 읽어주는 데 소홀했던 곳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실 집토끼에게 잘해야 산토끼도 잡을 수 있는 법이다. 잡은 고기도 먹이를 주어야 건강하고 예쁘게 자란다.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다행히 공급자가 서비스를 개선하면 수요가 창출된다. 이는 법칙에 가깝다. 이것이 해법이다. 이를 명심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하겠다. 하기 나름이다.

2024년 4월 29일 월요일 저녁 7시 30분 우리신학연구소에서 ‘인구 감소 시대 한국의 종교성’이라는 주제로 유광석 교수가 필자와 같은 맥락의 발표를 한다. 그는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이 발표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으시길 바란다. (세미나 안내 보기)

박문수

가톨릭 신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