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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人의 삶

뒤늦게 다시 신앙을 묻는다

뒤늦게 다시 신앙을 묻는다

어려서 세례를 받은 이후, 햇수로는 적어도 5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학 공부에도 제법 시간과 공을 들였고 신앙과 관련된 곳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평범한 신앙인이라면 접하기 쉽지 않은 정보들과 여러 종교인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다. 수십 년 동안 배운 내용의 핵심을 간략히 요약한다면, 하느님은 자연을 포함한 물질세계 안에,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비천한 모습 안에 숨어 계시다는 것, 우리의 가난과 고통 속에서 침묵으로 말을 건네신다는 사실이다. 가난과 고통은 배척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며 계시의 원천이라는 역설이다. 죽기 전에 참으로 이 진리를 깨친 후 눈을 감고 싶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과연 나는 신앙인인가를 묻는 횟수가 늘어 간다. 신앙인이라면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신앙인인가, 나는 어떤 신앙인인가, 나의 신앙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의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나는 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내 눈 속의 들보를 깨닫고 아버지처럼 자비로울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인격의 성장은 기대보다 무척 더디고 신앙도 생각보다 깊어지지 않았다. 내 존재의 근저에 자리를 잡고서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저 ‘믿는 구석’은 흐르는 세월 속에 희석되어 내 몸에서 다시 회의로 바뀌는 체험을 하고 있다. 가끔 이런저런 지면에 신앙과 복음을 근거로 가했던 비판 중 일부는 화살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와 꽂힌다.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여한이 있거나 초조한 것은 아니지만 노후 준비를 넘어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넘어 사후를 준비하는 여정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경험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살며 노후를 준비한다. 하느님이 없는 듯 사는 게 너무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내 눈앞에 노년이 왔듯이 죽음의 시간도 머지않아 곧 올 것이다." 나무 뒤에 해가 저무는 모습. (사진 출처 = pixabay.com)

노후 준비는 보통 육체적 건강, 경제적 대비, 정서적 안녕을 돕는 사회생활 등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권고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죽기 전에는 죽음 이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준비하는 데에는 필시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노후 준비에는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수용과 배려가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살며 노후를 준비한다. 하느님이 없는 듯 사는 게 너무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내 눈앞에 노년이 왔듯이 죽음의 시간도 머지않아 곧 올 것이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준비되어 있고 정서적으로 안정을 누린다고 인간 실존에 깃든 근원적 공허함을 행복과 희망으로 대치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삶에는 건강이나 경제적 안정 또는 정서적 편안함보다 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와 진리를 찾아 나선다. 인생이 쉽지 않은 것은 우리의 노력 여하와 관계없이 우리가 채울 수 없는 어떤 공간,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나 철학은 이러한 공간과 시간을 비집고 들어서려고 한다.

눈에는 쉽게 띄지 않지만 살아가면서 누구나 분명히 감지하는 이러한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부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 시공간에서 허우적거리는 삶, 고통의 바다, 사바세계에 던져진 삶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려는 삶의 방식이다. 이 해석은 교리가 아니라 신앙 선조들의 체험과 신앙인들의 역사에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이 해석의 극치가 부활 신앙이다. 논리적으로는 일단 죽어야 부활할 듯싶지만, 사실상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종말론적 초월 신앙이다.

그래서 이제 신앙은 나에게 무엇인가. 겨자씨 한 알에도 비할 바 없이 작은 나의 믿음은 나의 길을 밝혀 줄 수 있을 것인가. 비틀거리며 감당해 온 이 삶을 그분의 축복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면서 기꺼이 죽음을 환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나의 노후 준비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 이후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니 따로 공들여 준비할 것도 없겠다.

그러나 그분의 길을 찾고 그분을 따르려는 탐색자의 시선과 마음이 내게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 사태를 맞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눈이 감기는 날까지 살 수 있을 것 같다.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