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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삶(이웃사랑)

"철학자 예수", 예수 따르기 위한 탈상투화

"철학자 예수", 예수 따르기 위한 탈상투화

예여공 월례 모임에 강남순 교수 강연

‘예수님과 여성을 공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이하, 예여공)이 31일 강남순 교수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최근 “철학자 예수”라는 책을 낸 강남순 교수(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는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라고 부제를 덧붙여, “철학자 예수라는 개념은 이 땅에 몸담고 살았던 예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먹고, 그들 삶의 문제에 개입하고 연대하며 살았던 예수의 삶과 그 가르침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조명하고 되새기고자 하는 시도와 해석”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서교동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한 강남순 교수의 강연은 “철학자 예수”의 내용과 맥락을 중심으로 다뤘다.

“예수를 철학자라고 한 것은 예수를 탈상투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철학자로 부르던 구세주라고 부르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예수가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예수를 그리스도교의 독점물로 보는데, 예수는 독점물이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예수를 어떻게 따르고,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강남순 교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를 따른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혹은 여겨 왔던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의 사랑과 정의의 철학을 볼 텐데,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어진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 물음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 뿌리까지 아래로 내려가 질문을 다시 해 보는 것, 쓰여 있지 않은 것까지 상상하면서 질문하고 읽어 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살았던 1세기, 그리고 우리가 사는 21세기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껏 초월적 존재, 구세주라는 인식을 넘어 탈상투화하고, 예수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치러 온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우리의 예수에 대한 상투화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심오한 말을 예수를 그리스도교 안에 가둬 놓는 배타주의의 텍스트로 이용하는 것이라며, “예수를 따르려면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와 그리스도교는 일치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사명은 예수 자체와 제도화된 그리스도교 간의 엄청난 거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소위 예수 정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 삶의 구조에서 작동시키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강 교수는 예수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간극을 보여 주는 현상 중 하나를 한국 사회의 혐오와 불평등으로 꼽았다.

성소수자와 난민, 여성, 북한, 장애인.... 다차원적 위계, 다르고 약한 존재를 위험하고 열등하다고 여기는 인식이 바로 불평등과 혐오의 시작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저주하며 혐오 세력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철학자 예수”를 쓰게 된 여러 동기 가운데 하나가 그런 장면들을 목격한 것이고, “예수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무조건적 포용, 환대, 타자에 대한 책임과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를 들여다보고, 예수와 우리의 구체적 삶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예수님과 여성을 공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이 5월 31일 강남순 교수 초대 강연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강 교수는 최근 출간한 책 "철학자 예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현진 기자

예수라는 존재의 탈상투화

강남순 교수가 보는 상투화된 예수는 학습되지 않은 예수다. 곧 우리가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우리 삶 안에 예수를 비춰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탈상투화 하는 것은, 성경 문구 속에 박제되고,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예수에 대해, 그리고 성경 내용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에 대해 전혀 다르게 질문하는 것이다.

“주일을 지낸다는 것은 교회나 성당에서 좋은 옷 입고 앉아 헌금 내고, 돌아와서 자기 만족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매일을 살면서 묻지 않았던 질문, 마주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마주하는 것이 주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근원적 문제들,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하는 질문들입니다.”

그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삶 속에서 예수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다양한 가르침들을 내 유한한 삶 속에서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느냐는 것이고, 그것에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가?

강 교수는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예수가 상투적이듯, 가장 최고의 계명인 이웃사랑 역시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면서,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나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심오하게 만들어야 타자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동시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면서, “이웃의 범주 역시 상투화될 수밖에 없다. 다른 젠더, 인종, 장애인도 이웃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 관계가 상투화될 때, 그것이 가진 중요한 의미를 상실한다”고 말했다.

“예수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욕을 먹은 이유 중 하나는 언제나 죄인들과 먹고 마셨기 때문입니다. 소위 죄인이란 사회 주변부에 있던 이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어요.”

강남순 교수는 이웃 사랑, 예수의 환대와 포용을 말하며, 성경 속 자캐오 이야기(루카 복음 19장 1-10절)에 상상력을 더해 보라고 주문했다.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죄인의 친구 예수', 지거 쾨더 작.

세금 징수원인 자캐오. 로마제국이 고용한 유대인으로 부당한 세금징수 때문에 천시받은 세리였지만, 예수는 그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캐오는 예수의 환대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강 교수는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는 이 한마디는 그 어떤 종교적 심판이나 강요도 아니었고, 단지 자캐오를 함께 먹고 대화하는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로 초대한다면서, “생에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사람 취급했다는 느낌이 자캐오를 회개하도록 했고, 그것이 예수의 사랑과 정의의 철학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랑은 사랑한다는 고백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정치적 제도의 마련이며, 배제와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 사랑이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가를 생각한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올바른 질문이 바로 정의”

“예수가 살려던 삶은 무한한 끌어안음”

“한 존재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예수의 사랑과 정의의 철학”이라는 강남순 교수는 다시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예수의 질문 방식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예수는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지만 그 답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강 교수는 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이 중요하고, 배운다는 것은 좋은 질문을 배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어떤 불의가 있는가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불평등이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치열하게 학습하는 것만이 희망”이라며,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만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 어떤 불의와 차별이 있는가를 공부해야 한다. 몸과 마음의 배고픈 이들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에 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