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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김수환 추기경

<우리 옆에 살다간 성자 - 김수환 추기경>

<우리 옆에 살다간 성자 - 김수환 추기경>

선종한지 100일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김수환 추기경의 용인 묘지에는 하루 평균 1천 여명의 추모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추모여행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관행도 생겨났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죽음이 긴 울림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증거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이 뿌린 사랑의 씨앗이 얼마나 넓게, 또 깊이 뿌리 내려졌는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것도 많이 드러났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거듭 확인되는 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 면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분의 애창곡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등대지기’, ‘애모’ 정도로만 알았는데 이 밖에도 ‘사랑을 위하여’, ‘사랑으로’, ‘향수’, ‘저 별은 나의 별’ 등이 있다는 것도 이참에 알았다.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30년 동안 당신의 발이 되어 준 김형태 요한 형제를 들었다는 것도, 그의 영명축일을 해마다 챙겨주었다는 것도 이번에 밝혀진 사실이다. 1986년 7월, 추기경은 찾아온 변호인단을 통해 부천서 성고문사건으로 힘겨운 투쟁을 하 고 있던 옥중의 권인숙에게 “무어라고 인사와 위로의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심과 인간성 회복을 위해 용감히 서 있는 권양을 주님이 은총으로 보살펴 주시리라고 믿고 또 기도 합니다”라는 친필 메모를 전했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믿는다”는 신표였다.

인혁당 사건 가족을 비롯해서 김수환 추기경의 위로와 격려를 받은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또 옥중으로 찾아가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불의에 짓밟힌 사람들의 구명운동철 맨머리에는 언제나 김수환 추기경의 친필 서명이 있었다.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의 양동화와 황대권도 김수환 추기경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황대권에 의하면 옥중이라는 캄캄한 바다에서 등댓불을 보듯이 의지하던 분이 김수환 추기경이었고, 힘들 때 답답한 심정을 편지로 보내면 꼬박꼬박 답장을 주었다고 한다. 양동화는 “갖은 분열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에서 가혹한 종노릇을 하신 분”으로 어둠의 시대, 세상 모든 억울한 사람들의 통곡의 벽이었으며, 언로가 막힌 세상에서 추기경은 유일한 소통의 통로였고, 피할 곳 없는 자들에게 유일한 울타리였다고 말한다. 과연 그랬다.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통로가 있고, 울타리가 있고, 그리고 그의 위로가 있어 사람들은 그래도 따뜻하고 행복했다.

나는 김수환 추기경의 아호雅號가 옹기라는 것도 이번에서야 알았다. 2002년 3월 장학재단의 이름을 정할 때 처음으로 추기경이 밝혔다고 한다. 아버지가 바로 옹기장수였다. 천주교가 박해받던 시절, 신앙의 선조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옹기를 굽고, 그것을 내다팔아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이었던 옹기인데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에 당신의 아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옹기와 관련해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기, 여성단체의 유력한 간부의 남편이 공해 없는 옹기랍시고, 엉터리 특허를 내고, 전국의 옹기업자들을 고발, 전과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전과자가 된 사람들은 대개가 천주교인들이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옹기장수를 해왔는데 청천벽력이었다. 옹기에 남아있는 산화납의 함량의 규제치가 용기에 담겨있는 음료수의 규제치보다 높았다. 이는 명백한 불의였다. 옹기장수를 하는 전국의 천주교신자들 로부터 구원요청이 추기경과 정의평화위원회에 빗발치듯 몰려들었다.

이 때의 보사부장관이 김정례였다. 나는 김정례 장관한테 가서 대명천지 밝은 대낮에 어떻게 이같은 불의가, 그것도 정의사회를 부르짖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있을 수 있냐고 따졌다. 김정례 장관은 그래도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어서 천주교 신자들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공해기준 심의위원들이 저쪽에 이미 매수된 상황이어서, 그렇게 쉽게 바로 잡아지지 못했다. 결국은 장관이 심의의원들을 전원 교체하고 난 뒤에야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물론 일련의 과정을 김수환 추기경도 알고 있었다.

내 조국, 내 어머니

물론 그 어머니의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사랑이 더 깊고 거룩했겠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를 회고하는 글은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언젠가 당신이 쓴 수필 “어머니, 내 어머니”를 읽고 나는 크게 감동을 받 았다. 아마도 이 땅의 그 많은 ‘어머니 송頌’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날 가을 들녘이 보고 싶어 시골에 내려갔다. 어느 수도원의 손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가을하늘 아래 뜰 가득히 피어난 코스모스가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 어머니는 코스모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신데다가 젊었을 때에 는 분명히 (코스모스처럼) 그렇게 수려한 분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다분히 문학적인 필치로 시작되는 이 수필은 순교하신 할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가 옹기장수가 되어 충남과 경북을 전전하다가 대구처녀 어머니와 결혼한 내력과 함께 아버지가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는 과정을 담담히 적고 있다. 어머니는 여장부의 기질과 함께 사회적으로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을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귀하게 잘 자란 부잣집 아들로 키웠다.

추기경의 군위시절, 어머니가 대구에 다녀오시면서 사제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형과 김수환 추기경에게 ‘너희는 신부가 되라’고 이른 것이 두 아들에게는 운명이 되었다. 나는 추기경의 군위생가를 가 본적이 있는데, 그 때는 폐가처럼 퇴락해 있었다. 이 집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행상나간 어머니가 산등성이로 기우는 석양을 등지고 돌아올 때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추기경은 늙어서도 저녁하늘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또 형님이었던 김동한 신부를 어머니 다음으로 사랑했다. 김동한 신부 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어머니 다음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자랄 때는 물론이요 사제가 되어서도 김동한 신부는 추기경의 멘토였다. 김동한 신부는 죽는 날까지 가난한 사람들, 정신박약지체아, 폐병환자들과 함께 생활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형처럼 그런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지 못한 것을 늘 부끄러워했다.

1983년, 로마에서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김수환 추기경은 “가슴이 푹 패였다”고 한다. 김동환 신부는 당뇨로 고생하면서도, 동생인 추기경에 폐가 될까봐 가급적 만나는 것을 피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1년에 한두 번 스쳐가듯이 두 분은 만나곤 했다. 그런 형님이 타계하자 김수환 추기경의 슬픔은 너무도 컸다.

“우리 형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셨다. 나를 이 세상에서 어머니 다음으로 자기 몸처럼 사랑해 주셨던 분이다. 그리고 그 분은 많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하다가 가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형님은 진정 그 밀알 하나가 되셨다.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지는 그 사랑의 밀알이 되셨다.” 나는 김수환 추기경이 누구보다 이 나라를 사랑했다고 믿는다. 김수환 추기경은 앞서 말 한, 어머니를 회상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독일에 있을 때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독일국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방송으로 들었다.

“독일, 독일,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독일… 이라는 우리 독일 국가의 뜻은 결코 객관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우리 독일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에게 있어서 독일이라는 나라는 어머니 같은 존재요, 마치 우리 어머니가 객관적으로 평범한 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세상 제일가는 어머니이듯이 그렇게 우리 독일도 우리에게는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말한다. “그렇다, 내게 있어서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제일이고, 우리 어머니 서중화徐仲和 여사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어머니시다.”

그러기에 동성학교 다니던 청년시절, 학교에서 황국신민된 소감을 말하라고 했을 때 “나 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내어 뺨을 맞았다. 일본에 유학 가서도 게페르트 신부가 그의 진로를 물었을 때 “민족이 부른다면 정치가라도 되겠다”고 말했다. 따라서 김수환 추기경이 석굴암 앞에 서서 깊은 종교심에 빠지고, 자신의 안에 불교적인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 것이나, 심산상心山賞을 탔을 때 그 묘소에 찾아가 참배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때 빨갱이 만드는 일에 조력하던 홍지영 洪志英이라는 사람은 석굴암 앞에서 감동하는 김수환 추기경을 보고 크리스챤이 아니라고 까지 모략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언젠가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외국에 나갔을 때 할 수만 있다면 수도회나 수녀원 같은 데서 묵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온다는 것을 알면 여기저기 교회기관에서 당신의 방문을 간절히 바라지만, 새벽미사와 같은 그들의 요구들 들어줘야 되기 때문에 너무 번거롭고 피곤하여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훌륭한 사람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성인과 더불어 생활하는 사람에게 성인을 따라하기란 더없는 고역이라면서 김수환 추기경은 웃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또 시중에서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김수환 추기경 아니시냐”고 물으 면 “제가 가끔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라고 답했다. 제주도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았다가 당일 날 예약을 확인했을 때 항공사측에서 “김수환 군은 예약이 돼 있지만, 추기경 양은 예약이 안 돼 있습니다”라고 하면 “그러면 나는 누구랑 신혼여행을 가란 말이요?”하고 받는다. 이처럼 유머와 인간미가 넘치는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이렇게 여유로워 보였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격했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무엇보다 수십 년에 걸친 당신의 불면증이 그것을 말해준다. 추기경으로 살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근신했으면, 또 그 일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으면 그토록 많은 밤을 잠못 이루며 고뇌했을까. 우리는 너무 쉽게 듣고, 또 너무 쉽게 말하지만, “안다고 나대고 대접만 받으려고 한 내가 바로 바보”라는 고백은 뼈저린 고뇌와 자기성찰 없이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사람을 단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통감하면서, “주님, 죄인 김수환을 용서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신독愼獨이 몸에 밴 분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죽는 날까지 후회하고 자신을 통탄한 것은 소외된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하지 못한 바로 그것,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을 회한으로 여겼다. 빈민가에 가서 그들과 악수하고 그들을 위로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과 더불어 먹고 자고, 그들과 더불어 같은 화장실을 쓰는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을 더 없는 부끄러움으로 고백했다. 그처럼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고 엄격하려고 노력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당신 방 앞의 복도에 목각 현판을 걸어 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말 한마 디’라는 제목의 시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당신의 말 한마디에도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레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스런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다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돌이켜보면 김수환 추기경은 인간적이었기에, 너무도 인간적이었기에 우리가 미처 몰라 보았을 뿐 어쩌면 우리 옆에 살다간 성자가 아니었던가 생각되는 것이다. 하기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하느님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던 행복

내가 김수환 추기경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 어디서였던가는 내 기억에 분명치 않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될 무렵인 1974년 가을 쯤이 아니었던가 싶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될 무렵의 천주교회는 그때 백낙청 교수가 「사목」 잡지(57호)에 “한국 가톨릭 내부에는 아직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한 대로였다.

처음 만난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그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의 만남은 주로 가톨릭 여학생관(전진상교육관)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어려워 감히 만나 뵙자는 말씀을 드릴 형편이 아니어서, 대부분의 경우 추기경이 나를 불렀다. 내가 먼저 여학생관 2층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김수환 추기경이 천천히 계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너오시곤 했다. 때로는 외국에서 온 성직자들로부터 한국민주화와 관련된 해외소식을 함께 듣기도 했지만, 대체 적으로는 추기경이 나로부터 교회 밖의 민주화소식을 듣고 싶어 했다.

그 때도 물론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 안팎으로부터 많은 시련을 받고 있었다. 교황청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가고, 정의구현사제단은 너무 세차게 앞서 나가고, 노인사제들은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추기경으로부 터 힘들어하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 때 여학생관은 구속자가족협의회 등 구속자가족들이 남몰래 드나들 수 있는 피난처였고, 해외에서 가져오는 민주화소식이 전달되는 창구이기도 했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께 말씀드릴 것이 있을 때는 주로 편지를 썼다. 그 때 추기경을 만나 여학생관 2층에서 먹던 밥맛은, 내가 젊고, 그 때가 배고픈 시절이었던 탓도 있지만, 참으로 맛이 있었다.

1979년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윤보선 전 대통령관의 만남을 주선한 일도 있었다. 그 때 윤 보선 전 대통령은 재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고, 또 중심이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유달리 강경했다. 그는 1년에 한두 번 충남 아산의 선영에 성묘를 다녀오곤 했는데, 다녀오는 길에 수원의 ‘말씀의 집’에서 두 분이 만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피정지도를 위해 ‘말씀의 집’에 먼저 가 있었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우연히 들른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나는 형식이었다. 두 분이 그렇게 만나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눈 것은 아마도 그 때가 처 음이었을 것이다.

1981년 마더 데레사 수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내가 추기경께 간청을 드려, 당시 통혁당 관련으로 무기징역을 살던 청민?民 오병철吳炳哲의 딸, 수강이를 만나게 했다. 수강이가 무척이나 만나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는데, 수강이는 가지고 갔던 마더 데레사 책에 수녀의 싸인을 받아왔다. 198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교황을 알현할 때 재야인사 명단을 내가 작성했다.

아마도 1980년대 초엽이 아니었던가 싶다. 황인철 변호사 내외가 어렵게 홍제동 성당에서 영세를 했다. 그 사실이 곧 주교관의 김수환 추기경에게 알려졌다. 김수환 추기경이 황 변호사 내외를 불러 축하와 격려를 해주는 자리에서였다. 황인철 변호사가 교리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채 영세 받은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자, 추기경이 이를 받아 “괜찮아, 사실은 추기경인 나도 교리를 잘 몰라” 하더라는 얘기를 뒷날 나는 황인철 변호사로부터 들 었다.

1982년 10월에 이돈명 변호사가 회갑을 맞이하였다. 인권변호사의 맏형격인 이 변호사의 회갑을 그냥 보낼 수 없다하여 사람들이 힘을 합해 기념문집을 만들어 헌정하는 행사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 자리에 김수환 추기경도 함께 하였다.

10?26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김재규 장군의 가족을 비롯, 일행들이 소복을 입고 참석하였다. 김수환 추기경 앞에 나가 그들이 인사를 할 때 내가 그 옆에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인사를 받고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계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긴 침묵 끝에 김수환 추기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였다. 할 말이 없다는 말이 그 토록 깊고도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1980년대 중반, 김동한 신부 흉상제막식에 참석했을 때, 나는 우연치 않게 하루 종일, 김수환 추기경을 수행할 수 있었다. 고령 어딘가, 사슴 목장에서 점심을 들었는데, 그 때 점심을 준비한 사람들은 그 옛날 사제시절 만난 신자들이었다. 채소와 열무김치를 큰 양푼에 담아 고추장 넣고 비벼먹는 식단이었는데 나는 그 때 김수환 추기경이 파안대소하며 격의 없이 마음 놓고 그처럼 즐거워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나는 그 때 김수환 추기경도 역시 촌사람이구나 생각했다.

1986년 말에 나는 5?3사태로 쫓기던 이부영의 은닉과 도피를 방조했다는 이유로 뒤늦게 수배를 당했다. 1960년대부터 몇 번인가 수배를 당했지만, 나이 들어서 당하는 수배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수배생활을 더 힘들게 한 것은 이돈명 변호사의 구속이었다. 이부영이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이돈명 변호사 집에 숨어 있었다고 거짓 진술을 한 탓이었다. 이는 물론 사전에 나와 이부영 그리고 이돈명 변호사 사이에 간접적으로 양해된 일이기는 했다. 당시 이부영은 나의 알선으로 고영구 변호사 집에 숨어 있었는데, 고 변호사의 어머니가 80이 넘은 고령인데다 그 부인이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있어, 사실대로 얘기하다가는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될 판이었다.

아무리 포악한 정권이라도 60이 넘은 노인네 변호사를 구속하랴는 나의 가냘픈 기대를 짓밟고, 저들은 연행하던 그날로 이돈명 변호사를 구속해 버렸다. 나는 내가 이돈명 변호사를 구속케 했다는 죄책감으로 몸둘 바를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변호사의 가족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돈명 변호사가 연행되 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돼서 찾아간 바로 그 날 이돈명 변호사는 구속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날 밤 변호사의 집은 가택수색까지 당했다. 그것은 분명 나를 노린 것이었다. 다행히 안방 화장실에 숨어 가까스로 화는 면했지만, 참으로 참담했다.

고영구 변호사는 어떻게 젊은 자기 대신 이돈명 변호사를 구속되게 내버려둘 수 있느냐며 이실직고 하고 자신이 들어가겠노라 우겼다. 그러나 함께 모였던 인권변호사들은 사실 대로 밝혀도, 자신의 집에 이부영을 숨겨 주었노라고 위계로 거짓진술을 한 이돈명 변호사를 저들이 결코 그대로 내둘 리 없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구속되느니, 차라리 이대로 가자는 것이었다. 얘기가 끝났을 때 우리들은 눈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이돈명 변호사 구속의 전후사정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긴 편지로 알렸다.

내 수배생활은 6?29선언 이후까지 계속 되었다. 수배기간 내내 우리집 생활을 지탱해주고, 우리 가족을 보호해준 것은 친구 홍사덕이었다. 수배생활에 보태 쓰라고 김수환 추기경이 보내준 돈을 건네받았다. 사실, 수배자에게 돈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나는 차마 추기경이 보내준 돈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돈을 고이고이 간직했다가 수배가 해제된 후 애들 학비로 썼다. 물론 그 돈이 어떤 돈이라는 것도 애들에게 말해줬다.

수배생활 중 나는 감옥의 이부영으로 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이 은폐?조작?축소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담겨 있었다. 이 편지를 내게 전한 전병용은 당시 수배 중이었는데, 내게 이 편지를 전해준 며칠 뒤 체포 되었다. 이 편지가 그해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기념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세상에 폭로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의 모태가 되었다. 나는 이부영이 알려온 이 놀라운 사실을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 측에 편지로 전했다. 이것이 1987년 6월 항쟁 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내가 수배에서 해제되고 난 뒤 그러니까 6월 항쟁이 끝나고 난 그 해 여름, 불광동 내 집을 방문해 우리 가족 모두에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사실, 고3이던 맏딸을 비롯, 우리 가족들이 받았던 그 동안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기부직원들의 감시와 통제로 동네사람들은 우리 집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방문은 우리집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고, 애들에게 아비된 체면도 서게 해 주었다. 그날 저녁 김수환 추기경은 ‘등대지기’를 불렀다.

이렇게 나는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과 배려를 너무 많이 받았다. 공식적으로는 1988년 5월, 평화신문 창간 때는 김수환 추기경과 창간대담을 했는데, 비록 정의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신문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게 하자”고 다짐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해외에 나가면서 간혹 내게 원고 대필을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추기경이 해 달라고 하는 메시지의 뜻이 깊어서, 과연 그 말씀을 글로 소화하느라 그 때마다 애를 먹었다. 몇 년 전에는 언론사들의 요청으로 추기경과 대담, 그 대담록을 가지고 각 언론사가 김수환 추기경 인터뷰 기사로 내보낸 적도 있었다. 2005년에는 졸저의 서문도 김수환 추기경이 과분한 칭찬과 함께 몸소 써 주었다. 연말연시에는 연하장에 꼬박꼬박 답장을 주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성탄 및 부활절 메시지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물론 일반국민에게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깨우쳐 주는 시대의 징표가 되었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놓고 한 번쯤 고뇌해 보게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초청토론회 강연내용이나 언론과의 인터뷰기사 역시, 그 시기 우리네 삶에 지표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이 때쯤은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다리기까지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이 나라, 이 공동체를 위해 국민 앞에 전하고 싶은 추기경의 메시지를 내 손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그 같은 나의 소망을 말씀드린 일도 있다. 그냥 웃으시기만 했는데,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셨으니, 그것은 영원한 불발로 끝났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후에 여러 편의 조시弔詩가 있었지만, 나는 정현종 시인의 ‘김수환 추기경 영 전에’가 가장 마음에 든다.

너무 늦게

말씀드리지요만,

우리가 모자라

어려움이 그칠 날이 없었던 그 동안,

중대한 사안에 대하여

시의적절 말씀하시는 걸

우리가 얼마나 반겼으며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나라 위한 진정에 눈물겹고

그 생각의 균형감각과

그 내용의 더없는 적절함에

우리가 또한 얼마나 든든해했는지

당신은 혹시 알고 계시는지요.

실은 당신의 얼굴이 참 마음에 든다고

저는 늘 말해 왔습니다.

그 얼굴, 그 표정은

천품(天品)의 선의와

천품의 진정과

천품의 겸손의 육화였습니다.

말씀의 힘이 나오는 그 마음 -

그 마음

그 말씀

그 얼굴의

움직이는 표정이 없으니

나라가 텅 비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당신의 그 드문 미덕들을

추념하는

저희들의 아쉬움과 슬픔 속에

내내 꽃피소서.

- 김정남 / <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지냈다. 쓴 책으로 『진실, 광장에 서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