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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묵상 옹달샘-이해인

<기도 편지-구상 세례자 요한 선생님께>

<기도 편지-구상 세례자 요한 선생님께>

구상 세례자 요한 선생님께

세상엔 시가 필요하다고

유언처럼 말씀하신 시인 선생님

오늘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바삐 지내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수도원 성당에

11월의 나뭇잎을 닮은

하나의 시가 되고 노랙 되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와도

같은 해에 태어나신

강과 밭과 예수님의 시인 구상 선생님

탄생 100주년은 세상에서

아무나 축하받는 것이 아니겠지요

후대에도 기억될 만큼

그 삶이 훌륭했다는 증거겠지요

잠든 혼에 불을 놓는 예언자적 시인으로

삶을 관조하고 연구하는 철학자로

깊이 명상하는 기도자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언론인으로

문학을 가르치는 넓은 마음의 스승으로

오랜 세월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남에겐 관대하고 스스로에겐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

덕과 지혜임을 일러주셨습니다

우정을 잘 가꾸는 당신만의 비법도

지인들에게 살짝 알려주셨습니다

'난 말이지 인간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장점보다는 단점부터 트는 법을 익혀야

그 우정이 오래간다고 생각하거든'

이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려보지만

살다 보면 잘 실행되지 않을 적도 많기에

당신께 도움을 청하곤 합니다

많은 이가 힘들고 아픈 나날들!

전쟁은 줄었으나 분쟁은 늘어간다는

이 시대,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실상 사랑의 길에서 멀리 있는 우리

안팎으로 평화가 없어 슬픈

오늘의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당신은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싶으신가요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라 하시겠지요

헛된 야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좋은 욕심조차 때로는 내려놓고

남을 먼저 위하고 배려하는 법부터

다시 배우라 하시겠지요

강에 대해 많은 시를 쓰신

강을 닮은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밭에 대해 많은 시를 쓰신

밭을 닮은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자고

이 세상에서도

이 세상을 떠나서도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한 눈빛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선생님은

광야에서 목쉰 소리로 진리를 외치는

세례자 요한을 많이 닮으신

또 한 분의 세례자 요한이십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많은 친지들과 함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더 많지만

기도의 침묵 속에 묻으렵니다

선생님께서 태어나고 묻히신

이 땅에서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을 키우는 밭이 되고 희망으로 흐르는

강이 되어 더 성실하게 살아가는

생활 속의 시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더 행복해지겠습니다

'아니, 내 허락도 없이 말이야

왜들 이런저런 행사를 벌이고 그러나?'

아름다운 음악 속에 환히 웃으시며

지금 여기에도 함께 앉아 계신 거지요?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기도 속에 부활해서

우리를 비추는 별이 되어주시길 청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시인 선생님

죽어서도 죽지 않는

크고 푸른 별이 되신 우리 선생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성당에서

(2019. 11. 2)

- 이해인 <꽃잎 한 장처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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