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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향 가는길

< 오늘은 나, 내일은 너 >

< 오늘은 나, 내일은 너 >

지난여름 나는 스웨덴의 공동묘지 두 군데를 '관광'했다.

- 중간생략- 그 공동묘지 둘 중 하나에 있었지 싶다. 작디작은 채플이었다. 땅속에 묻히기 전에 다시 한번 이별하는 그 처소의 입구에 동판이 새겨져 붙어 있었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이 글은 <샘이깊은물> 주간이었던 설호정 씨가 쓴 <삶 그리고 마무리>라는 글의 한 부분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심장이 딱 멎는 듯했습니다.

"맞아!"

나도 모르게 입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이 평범한 진리에 설호정 씨는 눈이 찔린 듯했으며, 나는 심장이 멎는 듯했을까.

그것은 죽음을 나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죽음을 진정으로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죽음을 잊고 삽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더도 죽은 이들의 저 소중한 침묵의 가르침,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말 속에는 열심히 후회 없는 삶을 살라는 교훈의 의미가 더 큽니다.

'나만 죽는 줄 아느냐, 두고 보자, 너도 죽는다'는 힐난의 의미보다는, 언젠가는 누구나 다 죽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매일매일의 삶에 충실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하루를 충만히 사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준비입니다.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사는 생은 가짜 보석과 같습니다.

어느 호스피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세 마디는 "그때 좀 참을걸, 그때 좀 베풀걸, 그때 좀 재미있게 살걸"이라고 합니다. 임종하는 순간에 "사업에 좀더 많은 시간을 쏟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만일 내가 죽음에 임박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아마 무엇을 생각하기 이전에 죽음의 두려움에서 쉽게 벗어나지조차 못할 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두려움, 영원한 소멸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문득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에서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라고 쓴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사색하며 부처님도 타인이라고 여기시는데, 저야 오죽하겠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결국 제 사랑하는 가족마저도 타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시 죽음을 앞두고 후회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먼저 '좀더 책을 많이 읽을걸, 좀더 여행을 많이 다닐걸, 남한테 좀더 많이 줄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은 진실과 거리가 멉니다.

이번에는 '좋은 시를 좀더 열심히 쓸걸'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오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시에 대해 그 정도로 절대적 가치를 두고 살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시는 삶을 위한 것이지 죽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좀더 용서하고, 좀더 용서받을걸'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용서야말로 神의 몫이지 제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인 제가 진정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가장 후회할 것인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진정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온 점이 후회될 것 같습니다.

- 정호승 산문집<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