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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향 가는길

<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사랑의 성적표를! >

                                              죽음 후에 남는 것...

                              <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사랑의 성적표를! >

 얼마 전 군복무 중에 교통사고로 젊은 생을 마감했던 한 제자 신학생의 죽음을 지켜봐야했다. 늘 생글생글 웃으며 따르던, 정말 착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군복을 입은 채 말없이 누워있던 그의 주검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많이 울기도 했지만, 그보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그리고 왜 사는지 비통한 마음으로 되물어야 했다.

 유학에는 내세(來世)의 개념이 없다. 그리고 영혼의 불사불멸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혼백(魂魄)이 분리되는 것으로, 혼(魂)은 기(氣)가 되어 하늘로 흩어지고, 백(魄)은 땅에 묻힐 뿐이다. 즉 자연의 순리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삼불후(三不朽)라는 것으로, 덕(德)과 공(功) 그리고 가르침(言)인데 「春秋 左氏傳」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가장 뛰어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고, 그 다음은 공을 이루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말을 세우는 것이다. 비록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아 이것을 썩지 않는다고 말한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 「양공(襄公) 24년조」

 이 세상에 덕을 베풀고, 공을 세우며, 가르침을 펴야 한다는 이 삼불후의 개념을 통해 우리는 유학이 지닌 중요한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하나는, 인간 삶의 목적은 자신이 쌓은 것을 세상과 나눠야 하며,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일에 수신(修身)이 바탕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또 하나는, 이것만이 조상들 그리고 후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것을 통해 그들은 역사 안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도덕적으로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물론 하느님이다. 그것도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내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코린 13,12)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삶이다. 어떻게 살면 그것이 가능할까? 내가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살려면, 적어도 그분의 본질적 특성을 배워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주 오래 전에, 우리가 장례미사 때마다 복음으로 듣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마태 25, 31-46)를 묵상하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한 인간의 전체적인 삶을 심판하는 절대 절명의 시간, 예수가 제시한 기준은 단 한 가지였다. 재산도 학벌도 업적도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 얼마나 쌓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남을 위해 베풀고 나누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라는 단서가 붙은 것을 보면, 그나마 보답을 바라지 않는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만 인정받는 모양이었다.

 그때에는 얼마나 당혹스럽고 불만스러웠는지 모른다. 그 기준이 너무 불공평하고 편협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이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임을 깨달아가면서 고개가 끄떡여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분을 닮으려면, 이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그 많은 친지와 교우들의 임종장면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남들과 불화(不和) 속에 살았던 고통을 고백했고, 진실로 그들을 사랑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세상을 마치곤 했던 것이다.

 죽음 너머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대면했을 때 그분께 내어놓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뿐이었다.

 

- 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