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
녹(綠)의 미학
김정수 시인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
김상미(1957~)
녹은 공기 중의 산소에 의해 산화, 즉 부식되면서 생긴다. 상온에 40% 정도의 습도가 필요하다. 철은 붉은색, 구리는 녹청색의 녹이 스는데 시인은 이를 “쓸쓸함의 색깔”이라 한다. 쓸쓸함은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찾아온다. 사랑의 부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없어 느끼는 감정이다. 외롭고 쓸쓸함은 고독을 동반한다. 젊을 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지만, 나이 들어 활동이 줄어들면 사귀기 어렵다. 사랑도 때가 있다.
은연중 스민 고독은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스스로 만든 보호막 안에서 “삐거덕 기우뚱” 금이 간다. 쓸쓸함이 한참 커진 후에야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본다. 녹은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부식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다. 몸과 마음에 슨 녹도 제거할 수 있지만, 내면의 상처까지 온전히 치유하는 건 쉽지 않다. 가까운 사람이라도 만나야 창백한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하긴 쓸쓸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나. 녹슨 그대로의 색깔도 나름 멋있다.
- 경향신문 기고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