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크레스피 ‘성 요셉의 꿈’ (1620~16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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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이사 7,10-14 . 로마 1,1-7. 마태 1,18-24)
주님을 믿는다면 희망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꿈으로 메시지 전하시는 하느님
막막했지만 희망을 본 요셉처럼
주님을 따라 약속의 땅 찾아가길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요셉의 굳어진 생각이 꿈을 통해 변화하는 것을 봅니다. 같은 일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는데요.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먼저 미국의 유진 피터슨이라는 교수이며 목회자인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시험 점수를 매기다가 지겨운 나머지 몇 번을 내동댕이치며 한숨을 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꿈속에서 서점에 들어가 입구에 있는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았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1위는 내가 35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던 한 자매의 책이었다.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세 아이의 엄마이고 전업주부였다. 그런데 그녀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해 즉시 그녀에게 축하 전화를 걸었다. ‘방금 서점에서 당신의 책을 보았어요. 베스트셀러 1위예요. 대단해요. 나는 당신이 작가인 줄 전혀 몰랐어요.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는지, 내가 책 한 권을 사갈 터이니 꼭 사인 좀 해 주세요.’ 그러자 그 자매가 말했다. ‘제 책이 베스트셀러 1위라구요? 세상에! 정말 기쁘네요. 제가 그 책을 한평생 썼지만 그것이 1위라니?’
나는 전화 통화를 마친 다음 그녀가 쓴 책을 구입해 책을 펼쳤다. 책은 내용 전체가 목록 표로 이뤄져 있었다. 채소 목록, 세탁물 목록, 수선할 옷의 목록, 계산서 목록, 사야 할 물건 목록…. 다른 내용은 아무 것도 없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나 감동적인 설명, 명쾌한 해설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목록뿐이었다.”
그는 이 꿈을 통해 단순하고 반복되는 지겨운 일들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 일들이 하늘나라에서는 결코 가벼운 일들이 아님을 깨닫고 변화합니다. 그가 그렇게 지긋지긋해 하던 일, 곧 학생들 성적을 매기는 일에 정성을 다합니다.
다음은 송봉모 신부(토마스·예수회)님의 이야기인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미국에서 두 번째 학기 때 한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성서 주석 페이퍼를 제출했는데 영어 문장이 너무나 빈약해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과 긴장이 얼마나 컸던지 며칠을 우울하게 지내던 중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절벽 밑에 서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어찌나 높은지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절벽 위에서 튼튼하게 생긴 숫염소 한 마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올라갈 수도 없는 아득한 정상에 늠름한 염소 한 마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꿈을 보면서 처음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공부가 마치 절벽타기와 비슷하구나.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마치 깎아지른 듯한 저 높은 절벽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구나.’
하지만 꿈은 언제나 내게 힘을 주고 생기를 주기 위한 것인데,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지 하고 즉시 적극적으로 다음과 같이 꿈을 해석하였다. ‘그렇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현재로서는 저 높은 절벽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 늠름한 염소처럼 나도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겠구나.
그렇다! 저 염소는 몇 년 후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꿈을 해석하고 나니 퇴짜 맞은 페이퍼 때문에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않게 됐다. 용기를 내어 교수님께 전화를 해 페이퍼를 다시 교정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재작성해 통과할 수 있었다.”(송봉모 신부 「관계 속의 인간」 중)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 일이 우리의 굳어진 생각을 깨고, 행동의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예전에 로마서 4장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라는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희망이 없는데 어떻게 희망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말씀 중간에 몇 단어를 넣으면 이해할 수 있기도 합니다. ‘내 눈에 희망이 없어도, 그분의 눈으로 내다보고 희망하며.’ 그 구체적인 상황을 몇몇 성경 인물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의 눈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떠나라고 하긴 했는데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약속의 땅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막막함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눈에는 아브라함에게 보이지 않던 희망이 보였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에는 가려져 있던 많은 후손들과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희망이 없어 보여도, 주님을 믿는다면 희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데요.
구약에 나오는 요셉도 당장 벌어지는 일들만 보면 희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구덩이에 갇히고, 노예로 팔려 가고, 감옥살이를 합니다. 하지만 그가 희망할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을 내다보시는 분이 보여 주신 꿈을 강하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그를 희망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 희망할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셉도 그의 눈에는 희망이 아니라 두려운 상황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오해받아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고 희망을 내다보고 계시며, 그 희망과 함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희망적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희망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면, 주님이 보고 계신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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