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聖堂-감사 찬미 제사

주님 공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이사야60.1-6.에페3.2.3ㄴ.5-6.마태2.1-12)

떠나면 길이 보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

우린 길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면 길이 보인다 했습니다. 길 떠나는 동방박사들이 됩시다. 우린 지상의 순례자들입니다. 인생 자체가 여행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여행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인용한 인디언 격언입니다. 누구나 떠나야 하는 내적 여행을 말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걸을 수 있는 분들에겐 실제로 걸어나가기를 권합니다. 매일 8~9km씩 한참을 걷다 보면 진정 다른 인생을 만난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새해 시작해 볼 수 있는 멋진 도전이 될 것입니다.

1. 동방 박사들의 여정과 깨달음

그들은 불리움을 느끼는 순간 짐을 쌌습니다. 내면의 빛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얻어낸 수확은 무엇일까요? 천신만고 끝에 그들이 대면한 것은 허름한 거처의 가난한 집안의 모자(母子)였습니다. 무력하기 짝이 없는 꼬물거리는 갓난아기 모습에서 임금의 품위와 하느님의 빛이 솟아나는 걸 느낍니다. 경이롭고 놀라운 영적 체험입니다. 그들이 경배드리고 바친 예물, 황금과 유향이 그걸 말해줍니다. 최종적인 예물은 몰약이었습니다. 몰약은 죽은 이에게 바르는 시약입니다. 죽어야 할 운명의 인간 안에 거룩함과 존귀함이 들어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기 고장으로 돌아간 박사들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겸손되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특히 가난한 이들, 그들 가정을 예사로이 보아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구세주 모자 가정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입니다. 여행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2. 헤로데와 종교 지도자, 우리

헤로데는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가장 힘 있는 자로 군림하는듯하나 그가 보이는 것은 무지요. 꾸미는 것은 음모입니다. 메시아에게 경배드린다 했지만, 거짓이고 실은 죽여 없애려 듭니다. 연일 칼을 휘두르지만, 무위로 그칩니다.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에 정통했고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머리로 뭘 생각하느냐보다 발이 어디에 있느냐가 더 중요한지도 모릅니다. 기득권, 안락함에 취했을까요? 아쉬움이 없었을까요? 간절함이 빠진 신앙은 짠맛을 잃은 소금일 뿐입니다. 꼭 개인적인 절실함만이 아닙니다. 밤늦게 찾아온 친구의 허기를 해결해 주려 또 다른 친구의 문을 연신 두들기며 빵을 청하는 그 우정은 간절하기에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길을 잘못 들어 왕궁을 기웃거릴 수 있습니다. 호화로움, 안락 등에 취하지 맙시다. 그런 것들 안에 진리가 있지 않습니다. 수수하고 소박한 데에 주님은 계십니다. 우리를 인도할 별빛은 그분의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침판 삼아 길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깨달음은 높은 차원의 경지라기보다는 높은 데서 멀리까지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 멀리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우크라이나 난민,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에 끌려 나온 러시아 젊은이도 있고, 미얀마 백성들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까지 주님의 출현이 기쁜소식이 되어야 제대로 된 공현입니다. 약소하나마 주머니를 털어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한 기도가 올려질 것입니다. 하여튼 뭔가를 해야 합니다.

공현을 알리는 징조는 하늘에 있을지 몰라도 실체는 땅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땅에 내려오셨고 이제 가난한 민초들의 삶에 알알이 들어와 박히셨습니다. 우리 이웃 안에, 작은 이들 속에 육화하신 하느님을 알아 뵙고 경배드리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2023년, 무엇을 소망하는가? 소망이 기도되게 합시다.

서춘배 신부(의정부교구 병원사목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