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이사 60,1-6.에페 3,2.3ㄴ.5-6.마태 2,1-12)
은총의 직무, 꼼꼼히 챙겨 살아야 합니다
경외심 갖고 하느님을 뵙기 위해
주님의 참뜻 기억하고 실천하며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한 삶 살길
보니파초 디 피타티 ‘동방박사의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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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차를 우리다 수없이 덖음질을 당했을 찻잎에서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해버린 희생의 향기를 맡습니다. ‘잃고 버림’으로 복음의 완덕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우리는 매일 매일 모시는 주님을 새롭게 뵙습니다.
사전은 공현(公現)이 “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사람에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설명하며 우리가 주님을 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임을 일깨워주는데요. 새삼 주님을 뵙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살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숙고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성경은 주님을 직접 뵈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과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가 생각나는데요. 물론 주님과 삼 년을 함께 생활했던 열두 제자를 뺄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주님을 뵙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난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고백한 사실을 전하고 또한 변모의 산에서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온 제자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마태 17,6)했다고 알려줍니다. 그뿐 아니라 “황금 등잔대 한가운데에” 계신 천상의 주님을 뵈온 사도 요한은 두려움에 휩싸여서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묵시 1장 참조)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아서 주님을 뵙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히 간직되어야 할 마음은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며 두려움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녀야 할 두려움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느꼈던 바로 그 경외심입니다. 번제물 앞에서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던 아브라함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튼튼한 믿음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주님의 빛에 눈이 멀어서 “누구십니까?”라고 여쭙던, 낮고 낮은 그 심정입니다.
몇 해 전, 신문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추정된다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해 오던 예수님의 모습과 전혀 달랐는데요. 햇볕에 그을린 거뭇한 피부에 크게 뜬 부리부리한 시선, 무뚝뚝한 표정은 평범한 노동자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매일을 성실히 일하셨던 노동자였음을 고려할 때, 그럴듯했습니다. 더욱이 이사야의 예언은 그동안 우리가 지녔던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여지없이 깨부수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이사 52,2)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분명히 이르셨고 당신을 뵙고도 살아있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사랑임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하물며 주님의 공생활을 함께했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알려주지 않으니, 세상에서 주님의 얼굴을 알아낼 방법은 없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뵙습니다. 하늘의 조짐을 쫓아서 먼 길을 떠나왔던 동방박사들의 행적을 기리며 고귀한 꿈을 위한 그들의 숭고한 결단과 모습을 학습합니다. 이렇게 온 삶을 그분을 향해서 돌아설 것을 다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동방박사들의 간절함에 응답하시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천사들의 소식에 오직 기쁨으로 달려간 목자들의 단순함에 화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간절함이 그만큼 크다면, 우리의 영혼이 그들처럼 순수하고 단순하다면 당신을 뵈올 것이란 이르심이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뵙기 위해서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원의를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3)
세상 것들에 마비되면 영혼이 꼬질꼬질해집니다. 예사로이 복음을 무시하게 됩니다.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사랑까지도 주변에 널린 잡다한 것에 섞어,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의 삶이 예전과 다르지 않다면, 계속계속 여전히, 사랑이 메마른 팍팍한 삶을 살고 있다면, 복음을 온전히 습득하지 못했으며 복음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과 따로 노는 우리 곁에서 주님께서는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으십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복음과 동떨어진 우리 모습은 예수님께 너무나도 낯선 까닭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직무”가 있음을 밝힙니다. 사도의 권고를 오늘 보편 지향 기도가 잘 알려주고 있는데요.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 희망을 전하고 구원의 표지가 되는 것, 그렇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회복해 나가는 것, 희망을 잃고 슬픔의 계곡을 헤매며 기진한 영혼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러한 권고를 살아낼 힘은 그분께서 우리 영혼에 깊숙이 자리하실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히, 주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은 우리에게 은총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를 선물해 줍니다.
주님 공현 주일, 주님을 향한 우리의 경배가 스스로의 삶을 세밀히 간섭하는 지혜로 작용하기를, 하여 사랑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축복으로 전환되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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