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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곱씹어 깨치기

< 마지막 동화 혹은 전설에 부쳐 >

< 마지막 동화 혹은 전설에 부쳐 >

성탄은 꿈 같은 시기이다. 나는 이번 성탄에 내가 사는 오크랜드 인터네셔널 거리에 있는 <가톨릭 일꾼>에 가서 지냈다. 특히 과테말라에서 별을 따라 사막을 걸어, 화물칸에 숨어, 국경을 넘어온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아니, 사실 그 아이들이 진심 즐거웠을지는 모른다. 천진한 아이들은, 우리 수녀님이 성탄 전날 늦게까지 포장한 선물들을 듬뿍 받고, 즐거워했다. 미구엘이란 아이는 아홉 살인데, 선물도 뜯지 않고, 그저 핸드폰으로 게임만 한다. 아마 거쳐 온 어려움 속에 게임만이 그를 위로했나 보다. 나는 여자아이들과 매니큐어를 발라 주며 놀고 있었는데, 집에 갈 때 즈음에 나한테 공을 툭 던졌다. 소년에게 공이란 무얼까? 우리는 공을 주고받으며 겨우겨우 친구가 되었다. 

나와 번역기를 돌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마야라는 12살 소녀는, “나 한국에 가 보는 게 소원이야”라고 말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네가 어른이 되면”이라고 애매하게 이야기했다. 무작정 미국에 온 그의 가족이 언제 시민권을 얻게 되며, 또 언제 해외 여행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눈이 맑은 소녀가 어른이 되면 지구의 이곳저곳을 방문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오늘은 성탄절이니까. 세상이 함께 욕심을 내려놓고, 유약한 맘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니까. 어린이들은 비현실적인 선물, 인형과 매니큐어 같은 것이면 걱정을 잊고 행복하지만, 어른들은 무엇보다 현실적인 선물들이 필요했다. 내가 가져간 밍크 담요나, 한 평 남짓한 그들의 방을 덥힐 난로 같은 것들이 그들의 시름을 그래도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성탄의 의미를 생각했다. 이렇게 힘든 생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인텨내셔널 블루버드에 위치한 가톨릭 일꾼 하우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국경을 넘은 가난한 이들을 지켜 주고, 어린이들의 꿈을 밝혀 주는 이 공간에서 나는 아기 예수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박정은

곧 학기가 시작이다. 성탄의 꿈속에서 걸어 나와 일상의 분주함이 다시 발목을 붙잡으려는 시간, 성탄은 다시 한번 나를 동화의 나라로 초대한다. 성탄의 마지막 동화,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누군가 소설은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동화는 실패한 이야기 속에 깃든 아름다움과 꿈이라고 나는 정의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성서는 소설처럼, 동화처럼, 교회의 전통 안에서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 실패의 경험 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손길과 꿈을 보라고 이야기를 적고 있다. 성탄의 비현실스러운, 그래서 믿기 어려운, 이렇게 부드럽고 연약한 이야기 때문에, 가슴에 별 하나를 묻고 다시 여행을 떠나려는데, 현실은 나를 여지없이 강타했다. 여기저기 들리는 아픈 소식과, 세상을 떠나는 지인의 이야기들이 나를 소심해지게 했다. 새 학기가 시작인데, 나는 아직 달릴 힘을 얻지 못한 경주마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캘리포니아에 이상 기후 현상으로 폭풍이 왔다. 어젯밤에는 미친 듯한 비바람이 밤새 불었다. 나는 그러면 꼭 밖에 나가 보고 싶다. 이 거리에 텐트를 친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 새들은 어디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는지 궁금했다. 잠시 비가 잔잔해진 틈에 밖에 나가 보니, 고요한 중에 사람들이 밝힌 불빛이 환했다. 별은 없으니, 빛을 따라 걸었다. 은근히 위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미 피난처로 갔을까? 내가 가져간 빵을 그냥 집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햇살이 눈부신데, 거리로 나왔다. 열심히 집 앞을 쓰는 한 젊은 남자가 인사를 한다. “저녁에 다시 폭풍이 오는데, 왜 집을 쓸어요?” 하고 물으니, “아는데, 난 그냥 둘 수가 없어요. 또 내일 다시 쓸지요” 하면서 웃는다. 집이 예쁘다는 나의 칭찬에 아직 갚아야 할 돈이 많지만, 처음 장만한 집이라고 말하는데, 젊은 아빠의 긍지가 보여서 나까지 흐뭇해졌다.

그리고 보니, 여기저기 잘려 나간 나뭇가지들이 거리를 거의 덮고 있다. 커다란 가지도 있고, 아직 푸릇푸릇한 어린 가지들도 있다. 종려나무 잎들은 마치 소화 안 되는 폭 넓은 치마처럼 길가에 널부러져 있고, 레몬들도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가장 힘차게 살아남은 것은 가녀린 풀들이다. 땅바닥에 가장 낮게 엎드린 풀들은, 아직도 빗방울을 무겁게 이고서도,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다. 물론 때가 되면, 이 꽃들은 그리고 이 풀들은 시들겠지만, 최소한 이 약한 생명들은 이 비바람을 견디고 살아내었다. 그리고 보니, 나무 저 높은 곳에 살짝 기대고 살아 있는 푸른 풀포기가 눈에 확 들어온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보여 주신 신비를 묵상하는 오늘, 하늘나라의 생명은 이렇게 어리고 부드러우며, 낮은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간밤의 폭풍으로 많은 가지들이 부서지고 흩어졌지만, 생명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들은 작은 것, 낮은 것, 그리고 보잘것없는 풀포기. 커다란 나무 높은 꼭대기에 몸을 기댄 채, 거센 비바람을 견뎌낸 저 푸르름에 건배. ©박정은

성탄의 마지막 동화, 동방박사들과 낙타, 그리고 별은 아름답지만, 또 돌아갈 길을 생각하면 조금 막막하다. 아름다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고 돌아가는 길에, 폭풍을 만난다면, 더 이상 별빛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 낮게 땅에 엎드려 지나야 하는 길을 만날 것이다. 이제 곧, 요셉과 마리아도 아기 예수를 모시고, 거친 길을 지나고 지나, 이집트를 향하는 여행을 시작하실 것이다. 그래서 주의 공현, 그 동화 다음의 시간이란, 집을 처음 마련했다는 젊은 아빠의 패기는 없을지라도, 생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며, 생의 비바람이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었을 나이 든 아버지 요셉이 걸어간 이집트까지의 여정 같은 일상을 걸어가는 것이리라.

동화에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부자이거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신앙하는 신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 가난한 사람이 되신 분이니까. 이제 일상의 팍팍한, 동화 같지만은 않는 날이 밝았다. 마음에 품은 별을 따라, 주님을 경배하던 추억을 마음에 묻고, 이제 다시 돌아갈 길을 생각한다. 그리고 별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 왔음을, 그러니 이제 일어나 가야 할 시간임을 기억할 일이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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