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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왜 절해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르자(2)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르자(2)

물론 사람들은

종교 없이도 잘산다.

그러나 자비심, 사랑, 용서 같은 것은

사치품이 아니다.

오히려 생존에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내가 자비심과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묻곤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을 키울 수 있겠느냐고.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 자비심 같은 것을 즉석에서

키울 수 있는 비법은 없다.

자판기나 컴퓨터처럼

단추 하나만 누르고 기다리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달라이라마라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단지 내가 겪은

경험을 얘기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속에서 옥석을 가리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물론 내 경험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괘념치 말기 바란다.

먼저 분노의 결과,

또 사랑과 자비심에서 나온

행동의 결과를 알기 위해서는

일상을 잘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런 두 가지

마음 자세를 비교 연구한다면

분노가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와

자비가 가져오는 긍정적 결과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심으로 인해

우리가 얻는 혜택, 그리고 분노,

증오 같은 감정이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

(이 감정들이 타인보다는

우리 자신의 내부에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를

확실히 알고 나면

우리는 분노를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이다.

분노가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분노와 증오가 우리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부정적 감정은 우리에게

하등의 보탬도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천재나 인재가 일어났을 때

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분노하면

더욱 용기가 나고 힘이

솟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비록 분노로 인해 품었던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힘이

솟는 것은 사실이나

그 힘은 ‘맹목적 힘’으로

제대로 제어하기가 어렵다.

분노한 그 순간에는

못 느낄지 모르지만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된다.

분노했을 때는

심한 말을 하게 되고 일단 입밖에

낸 말은 돌이킬 수 없다.

분노의 감정이 사그러들고 나서

그 사람을 다시 봤을 때

매우 난감하다.

분노의 순간

우리는 판단력을 잃고

반쯤 광적인 상태에 빠진다.

분노에도 강도와 차원이 있는데

작은 분노가

일어나려 할 때는 자제하기가 쉽다.

그러나 심한 분노가 밀려올 때는

그것을 다스리는데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일단 분노한 마음 자체를

스스로 인정하기만 해도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다.

분노가 줄어듦에 따라

우리는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더 많이 웃게 되고,

친구도 더 많아진다.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해지는 것이

행복의 주요 원천이다.

밖에 있는 적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잔잔한

마음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잔잔한 마음은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분노만이 행복이나

환희를 앗아갈 수 있다.

진정한 적은 분노이다.

우리의 마음엔

여러 가지 심적 차원이 있으며

그 모두가 행복에 관여한다.

이런 다양한 심상을

잘 파악했을 때 긍정적이고

유익한 마음을 키우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마음을 없애거나 피할 수 있다.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것과

마음을 잘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외부 세계를 관찰하기 위해선

커다란 실험실과

엄청난 예산이 들지만

내부세계에선 그렇지 않다.

그 대신 유용한 생각과

해로운 생각을 잘 가려서

좋은 것을 간직하고 키워나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은 좀더 조화롭게 되고

우리 자신도 더 행복하고 안정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수련은 일종의

‘마음을 위한 요가’라 할 수 있겠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자신에게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자세!’라고

말하자.

이런 이타심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나 자신이 이런 수련을 했기 때문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모든 이에게 성실하게 대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를 해한

중국인에게까지도 성실하려 한다.

만약 내가 어떤 형태로든

나쁜 마음, 분노, 증오를

키운다면 누가 해를 볼 것인가?

나는 행복을 잃어버리고,

잠도 못 자고, 식욕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분노가

중국인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이 혼란하면

몸도 약해지고 그렇게 되면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던

사람마저 불행하게 된다.

물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환희에 찬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자유와 정의를 위해

효율적으로 일하고 싶다면

분노나 적의는 버리는 것이 좋다.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고

진심으로 일한다면

앞으로 삼사십년은 일할 수 있다.

여태까지 내가 진정한 형제애,

인간애에 바탕을 두고

비폭력주의를 지켜왔기 때문에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 달라이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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