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聖堂-감사 찬미 제사

<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

사순 제3주일

(탈출 17,3-7.로마 5,1-2.5-8.요한 4,5-42)

<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

우리나라에서는 못생긴 사람을 오징어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고, 또 호박이나 메주에 빗대어서 말합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까 싶어서 찾아보니, 일본에서는 배꽃처럼 못생겼다고 말하고, 불가리아에서는 샐러드처럼 못생겼다고 말하더군요. 나라마다 못 생김의 기준으로 삼는 사물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물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 같습니다. 자기 세계에서는 전혀 못생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고 또 최고로 멋진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잘 생기고, 못 생기고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구분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요즘에 거북목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모니터를 많이 보면서 거북목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 계속 나가다가는 거북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표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계속 진화되는데, 진화의 방향이 거북목으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백 년 후, 거북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상이고, 거북목 없는 사람이 비정상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미의 기준이 이제껏 계속 바뀌었던 것을 생각하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지금의 판단이 결코 옳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미의 기준도 바뀌는 것처럼, 지금 맞다는 것도 어느 순간 당연히 틀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온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목이 마르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온 세상 구원에 목이 마르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이 이방인 취급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에 목마르셨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현실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동문서답하는 형식으로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하십니다. 그 결과 진정한 예배에 대한 말을 나눌 때는 처음 생수에 관한 대화하는 다르게 일 보 전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이제 고을에 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직접 증언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벌건 대낮에 우물가를 찾았던 여인인데 말이지요.

주님의 뜻에 우리 모두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운다면 주님 뜻이 세상에 펼쳐지지 않습니다. 우리 구원에 목이 마르시는 주님의 갈증을 풀어 드릴 수 없습니다.

-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알버트 아인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