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쉬며 목 축일 샘-法頂

< 책 속에 길이 있다 >

< 책 속에 길이 있다 >

요즘에는 우리 한국인의 창의력 부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경제도, 축구도 창의력이 부족해서 탈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되풀이와 비슷비슷한 모방, 그것은 창의력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힘을 창의력이라고 합니다. 창의력은 본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탐구하고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서 그 바탕이 이루어집니다.

한국인의 창의력 부족을 이야기할 때 첫째로 꼽는 게 교육문제입니다. 해방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제도도 계속 바뀌어서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을 그동안 못한 것입니다.

독창적인 창조 능력은 머리가 비어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빈 머리를 채우는 데는 독서만한 것이 없습니다.

독서란 무엇입니까. 남들이 오랫동안 겪으면서 축적해온 지혜를 우리가 손쉽게 책을 통해서 자기 삶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낱낱이 이 도시 저 항구로 몇 백 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남들이 일찍이 겪으면서 축적해 온 그런 지혜를 책을 통해 자기 삶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을 키우면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게 바로 독서입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언입니다. 분명히 책 속에 길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 시인이며 서화가인 황산곡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장부가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은 언어가 무의미하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추해진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옛사람의 서화를 대하면 얼굴에 끼는 속기俗氣를 털어낼 수 있다."

흔히 책에서 오는 기를 서권의 기[書卷氣]라 하지 않습니까. 서권기란 독서에서 얻어지는 기개와 기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글씨와 그림에 서권기가 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이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명화와 글씨를 날마다 대하며 감상함으로써 그것을 창조했던 그 인격이 옮겨와서 내 자신의 서권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독서하던 태도를 이 자리에서 함께 음미해 보고 싶습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 선생은 독서량이 굉장합니다. 최근에 제가 문헌을 이것저것 들춰보고 있는데 [한정록閑情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독서에 대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독서에는 독서하기 좋은 때가 있다. 위나라의 동우라는 사람은 삼여三餘의 설을 들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있음직한 이야기입니다. "밤은 낮의 여분이고, 비오는 날은 맑은 날의 여분이며, 겨울은 한 해의 여분이다. 이 여분의 시간에 일념으로 집중하여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농경사회에서는 밤과 비오는 날에는 들에 나가서 일 할 수 없기 때문에 집에서 책을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겨울철에는 일을 다 해놓고 차분히 집에 앉아 독서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뜻으로 삼여의 시간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세 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맑은 날 밤에 고요히 앉아 등불을 밝히고 차를 달이면 온 세상은 죽은 듯 고요하고 이따금 멀리서 종소리 들려온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들고 피로를 잊는다."

밤새워 독서를 했기 때문에 새벽 세 시에 범종 치는 소리가 들려왔는가 봐요.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들고 일상생활에 묻었던 피로를 잊는다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길을 막으면 문을 닫고 방을 깨끗이 청소한다. 사람의 출입은 끊어지고 서책은 앞에 가득히 쌓여있다.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뽑아든다. 시냇물 소리 졸졸 들려오고 처마밑 고드름에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가 둘째 즐거움이다."

책만 읽는 것이 아니고 책을 읽을 때의 어떤 풍류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 잉크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붓으로 메모도 하고 그랬던가 봅니다.

"낙엽이 진 숲에 한 해는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거나 눈이 깊이 쌓였다. 마른 나무가지를 바람이 흔들며 지나가면 겨울새는 들녘에서 우짖는다. 방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있으면 차 향기 또한 그윽하다. 이럴 때 시집을 펼쳐들면 정다운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이런 정경이 셋째 즐거움이다."

허균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옛사람들은 독서를 하면서, 오늘 우리처럼 책장만 훌훌 넘기며 내용만 빼는 것이 아니라 독서하는 분위기, 자연과의 교감, 다시 말해 독서를 통해서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여백까지도 읽어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풍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인격이 제대로 닦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독서의 분위기라든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책밖에 들어있는 그 소식까지도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책은 안 읽었지만, 산골에 살면서 곁에 책이 있기 때문에 든든할 때가 많습니다. 혼자 살고 있지만 좋은 책들이 있기 때문에 내 스승이 곁에 있고, 내 친구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든든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도 책으로 맺어진 인연입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전혀 낯선 사람도 이렇게 연결시키지 않습니까. 동서고금의 어떤 작가와 작품을 대한다 하더라도, 오늘 나와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이란 이처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좋은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제 산중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도 책을 읽는 재미에 있습니다. 물론 독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낮에는 이것저것 밭도 가꾸고 일을 하다가 저녁에 등불을 켜놓고 책을 몇 장이라도 읽고 있으면 매우 좋습니다. 새 책을 읽을 때는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다시 볼 때에는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습니다.

같은 책도 읽는 때와 장소에 따라 그 감흥이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경험담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 글을 유배지의 현장인 강진의 다산초당에 가서 읽어보십시오. 집에서 읽는 것과 그 감흥이 전혀 다릅니다.

고산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보길도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읽어보십시오. 아파트 몇 동 몇 호에서 읽는 것과는 그 감흥이 전혀 다릅니다.

저는 국내에서도 그렇고 여행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책을 몇 권 가지고 나갑니다. 인도 불교 유적지를 순례할 때도 책을 몇 권 가지고 나갔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은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가서 부처님이 설법했던 [숫타니파타]라는 초기 경전을 읽으니까 마치 부처님의 육성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는 느낄 수 없었던, 머리로만 받아들였던 그런 법문이 그 현장에 가서 들으니까 전류를 느끼게 합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도시에서 읽을 때는 감흥이 별로였는데 산골 오두막의 겨울 난롯가에서 읽으면 그렇게 좋습니다. 물론 저도 보스톤에 갔을 때 '월든'이라는 그 작은 호숫가를 들러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스스로 머릿속으로 그렸던 현장을 목격하면 책에서 읽었던 감흥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자와의 교감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책[良書]은 베스트셀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스트셀러는 한때입니다. 말하자면 베스트셀러가 모두 좋은 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좋은 책은 세월이 결정합니다.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있는 책들은 모두 세월이 결정해 준 것입니다.

세월의 체에 걸러져서 남은 책들이 바로 양서입니다. 그런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그리고 읽는 사람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합니다.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사실 한 번 읽을 가치도 없습니다.

독서인은 양서良書와 비양서非良書를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양서와 비양서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 독서인입니다.

또한 책을 읽을 때는 느긋하게 읽어야지 조급하게 건성으로 읽지 마십시오. 조선조(16세기)에 지리산에서 사시던 청매 선사의 글 중에 '십무익성十無益聲'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열 가지 무익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보면 독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속에 비춰보지 않으면 그런 독서는 무익하다.[心不觀照無益]"

이 말씀은 우리가 책에 읽히지 말고 책을 읽으라는 뜻입니다.

입시생들은 흔히 책에 읽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독서가 아닙니다. 시험을 치고 나면 그냥 잊어버려요. 책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속에 비춰보지 않으면 그런 독서는 무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벌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책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활자로 나타나지 않은 여백까지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 기댈 곳이 없어서 갈팡질팡 헤맬 때일수록 인간의 지혜가 모인 책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책을 더 읽어야 합니다. 밖의 물결이 거세니까 안으로 탐구하는 길을 스스로 모색해야 합니다.

독서를 통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하는 살아있는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 그 자체가 삶의 충만입니다. 이것은 방송이라든가 영상매체에서는 누릴 수 없는 활자매체만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창의력이 부족해서 오늘과 같은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하니까 독서를 통해서 창의력을 길러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기죽을 것은 없습니다.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삶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지혜를 우리가 받아들여서 오늘을 지혜롭게 산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법정 스님

덧붙임 :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독서주간 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