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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人의 삶

납북됐다 탈출, 암살 위협에 은둔… 20년 만에 고국 땅 밟아

  • 납북됐다 탈출, 암살 위협에 은둔… 20년 만에 고국 땅 밟아
  •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2) 최은희 데레사 (하)

 

최은희. 출처=「최은희의 고백」

안양영화예술학교 세워 연기자 양성

최은희(데레사, 崔銀姬, 1926~2018)는 신상옥과 함께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전문적인 연기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예술학교가 필요했다. 그래서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는 안양촬영소 안에 만들었다. 최은희가 교장을 맡았다. 교훈은 ‘배우고 노력하는 인간이 되자. 민족예술을 창조하는 선구자가 되자’였다. 월탄 박종화가 교훈을 지어주었다.

최은희는 연기자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다섯 가지 씨’(마음씨, 맵씨, 말씨, 솜씨, 글씨)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교육철학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촬영소와 극단(‘배우 극장’)은 실기교육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신필름의 경영이 점점 힘들어졌다. 자연히 학교 재정도 어려워졌다. 최은희는 학교 재정을 위해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출연료로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다. 그러다가 한 홍콩영화사에서 자매결연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학생들을 글로벌 연기자로 키우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예술학교를 대학으로 확장하려고 땅까지 마련해 두었고, 설계도 의뢰한 상태였다.

홍콩으로 출국했다. 자매결연을 위해서는 그 홍콩영화사 사장을 만나야 했다. 그런데 만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그러다가 한 한인 여성을 만났다. 그는 학교에 도움이 될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며 외딴곳으로 데려갔다. 바닷가에서 보트를 탔다. 보트는 먼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더니 보트 주인이 ‘북한으로 간다’고 말했다. 최은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쓰러졌다. 커다란 배에 옮겨탔다. 머리를 벽에 박으며 몸부림쳤다. 또 기절했다. 배는 며칠 후에 남포항에 도착했다. 선착장에 내리니 한 사람이 다가왔다. ‘김정일’이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때부터 북한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미국 성당에서 최은희 신상옥 부부 세례 기념 사진. 맨 왼쪽에 이경재 신부. 출처=「성라자로 마을 70년 사진과 이야기」

북한서 다시 만난 신상옥 감독

어느 날 밤에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를 맞추다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우 고은정이었다. 고은정이 대북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쏟아졌다. 고은정은 납치해 간 최은희를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김정일은 최은희를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러나 최은희는 정신적으로 늘 불안했다. 혈압도 높아졌고, 소화불량도 생겼다.

초대소에 있을 때였다. 산책을 나갔다가 한적한 산길에서 한 젊은 여성을 만났다. 서로가 놀랐다. 그 여성은 중국인으로 최은희처럼 납북된 여성이었다. 어느 날, 그 여성은 외국인 상점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사왔다며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십자가를 놓고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그 여성은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였다. 두 사람은 낙엽 속에 몸을 숨기고 함께 성모님께 기도드렸다. 그 여성은 최은희에게 ‘마리안느’라는 세례명을 지어주었다. 최은희는 그날 하느님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다. 이제까지 숱한 위험과 곤경에 처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을 구해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정일이 최은희를 연회에 초대했다. 3년 만에 다시 그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신상옥을 만났다. 서로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신상옥은 최은희가 북으로 납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갔다. 그곳에서 최은희처럼 납치되었다. 납치된 신상옥은 고초를 당했고, 탈출을 시도했고, 붙잡혔고, 감금되었고, 또다시 탈출을 시도했고, 또 붙잡혔고, 고문을 당했다.

이제 지쳐 탈출을 포기했을 때 최은희를 만난 것이었다. 최은희와 신상옥은 서울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부부는 영화 ‘춘향전’에 필요한 소품을 구하기 위해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갔다. 새벽에 감시망을 피해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갔다. 그곳 신부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자신들에게 내려지도록 기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신부는 정성을 다해 기도해 주었다. 참으로 경건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부부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영화 ‘소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최은희는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차디찬 얼음이 떠다니는 압록강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머리에 소금 자루를 이고 거센 물을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몸이 꽁꽁 얼었다. 촬영 후유증은 컸다. 밤마다 극심한 오한이 일어났다. 최은희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후에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했다. 뜻밖에도 그곳에서 임권택 감독과 영화배우 김지미를 만났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나 남과 북의 이념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부부는 영화 합작 건으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갔다. 출국 전에 부부는 은밀히 탈출 시나리오를 짰다. 부부는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

택시를 타고 미국대사관으로 향했다. 목숨을 걸었다. 마치 첩보영화처럼 움직여 미국대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고국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갔다. 국내 사정이 안정될 때까지 제3국에 있기로 했다.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북한으로부터 암살위협은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은둔 생활을 했다.

어려움 처할 때마다 이경재 신부 도움

최은희는 미국에서 한국 의왕 라자로 마을(한센인 요양원)에 있는 이경재 신부에게 연락했다. 최은희가 안양영화예술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과 함께 라자로 마을에서 위문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이 신부는 최은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정신적으로 많이 위로해주었다. 최은희는 이 신부에게 신상옥과 함께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다.

이 신부는 그들 부부에게 교리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었고, 미국에 있는 교우도 소개해주었다. 그 교우가 매번 방문하여 교리를 가르쳤다. 얼마 후에 이 신부가 미국으로 왔다. 미국 워싱턴 바티칸 대사관 안의 작은 성당에서 최은희 부부 영세와 혼인성사가 거행되었다. 후에 자녀들도 세례를 받아 온 가족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최은희의 뜨겁고 강한 신앙이 온 가족을 성가정으로 만든 것이다.

신상옥은 미국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다. C형 간염으로 판정되었다. 북한에 있을 때 감염된 것 같았다. 미국으로 망명해서도 초인적으로 일했기에 건강이 많이 상했다. 그 밝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최은희는 신상옥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신상옥은 이를 받아들였다. 20여 년 만에 귀국했다.

경기도 안양에서 다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안양은 최은희 부부가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다 바친 곳이었다. 그곳에서 영화 전시회도 열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신상옥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의사가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식 수술을 했다. 황달이 찾아왔다.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또다시 간이식 수술을 했다. 그런데 수술 후 사후 관리를 잘못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신상옥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은희는 가슴이 찢어지는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장례식에서 공군군악대가 ‘빨간 마후라’를 연주했다.

후에 최은희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추진하는 장기기증운동 홍보대사에 위촉되었다. 위촉식에서 최은희는 각막 기증을 서약하며 ‘생을 정리하면서 뭔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장기기증 홍보대사라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실제로 최은희는 세상을 떠난 후에 자신의 눈을 기증했다.

최은희는 척추협착증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또한 신장투석을 정기적으로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신상옥이 세상을 떠난 후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오랜 시간 투병했다. 결국 최은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삶을 고해성사하듯 적은 「최은희의 고백」이란 책을 남겼다.

한 영화평론가가 말했다. 최은희는 네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고. 하나는 영화감독 신상옥의 페르소나, 다른 하나는 1960년대 한국 영화사의 페르소나, 또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상처 입은 한국사의 페르소나, 마지막으로는 한국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판타지를 고스란히 구현한 여성 페르소나.

참고자료 : ▲최은희 「최은희의 고백」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가톨릭평화신문(2010.6.14) ‘영화배우 최은희씨, 장기기증 홍보대사 위촉’ ▲가톨릭평화신문(2018.4.18) ‘염수정 추기경, 원로배우 최은희씨 선종에 애도 메시지’ ▲가톨릭평화신문(2006.4.19) ‘고 신상옥(시몬) 영화감독의 삶과 신앙’ ▲신성일 「청춘은 맨발이다」 문학세계사. 2018 ▲국민일보(2019.8.3)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진 배우 최은희… 한국 영화사의 거의 전부’ ▲한영기 「처음과 같이 영원히」(성라자로마을 70년 사진과 이야기) 누보·여백. 2020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