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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김수환 추기경

<인생의 참된 가치>

 

<인생의 참된 가치>

지난 여름 일본에 잠시 갔을 때,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경영하는

한 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자기의 아내와 꼬마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하며 "신부닌,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그날 밤, 그날 밤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는 그 젊은이의 얼굴을 눈여겨보면서

"그날 밤" 하며 기억을 더듬다가 "아, 알겠습니다.

알고 말고요. 그날 밤의 일을 아직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의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까지 학교 내 기숙사에 있는

자기 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받으니 다급한 목소리로 "저 아무개입니다.

저녁 늦게 죄송합니다만

신부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시간이 있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어왔습니다.

신부는 전화를 건 사람이

자기 학교 학생 아무개라는 것을 즉시 알고,

또 무언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밤 12시까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학생이 나타나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놀랍게도

자기는 더 살 가치가 없는 존재이므로

자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이 자살을 결심하게 된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외아들로 태어난 그 학생은 부모로부터

어느 일류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대단한 기대와 독촉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교 성적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어서

고민하고 있었고, '그날 밤'에도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늦게 돌아온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먼저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고

"우리 집 저 애는

성적이 좋지 않아서 암만해도

우리가 원하는 그 대학에는

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어쩌면 좋지요?" 하며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 말을 받아서

아버지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이 바보야, 그게 다 네 탓인 줄 알아.

내 말대로 그 때 떼었으면

오늘 이런 걱정은 없지"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학생은 한꺼번에 천지가 무너지듯

눈앞이 캄캄해지는 소름을 느꼈습니다.

"나는 부모가 태어나기를

원한 존재가 아니구나…

그렇다면 내가 살아서 뭐하나. 죽어야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부모에 대한 보복으로라도

죽어야 한다고 작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존경하던

은사인 신부님의

얼굴이 떠올라서 마지막으로

그분에게 이를 알리고

곧 죽겠다는 생각으로

그 밤에 전화로

면담 신청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신부도

한참 동안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그 학생에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지금 자네의 괴로은 심정과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생각을

나도 깊이 이해할 수 있네.

그러나 자네가 죽는다고

그것이 자네 자신이나 자네 부모나

이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네.

자네는 죽음으로써

귀한 생명과 삶을 잃고,

자네 부모는 그것으로 한없이

자책의 고통을 겪을 것일세.

자네가 죽겠다는 것을

부모에 대한 하나의 보복으로

생각하는데 그렇게 부모를

괴롭혀서 자네라고 기쁘겠는가?

그러나 냉정히 생각을 다시 하여

오히려 이 불행을 극복함으로써

행복을 창조하는 용감한 젊은이가 되어 주게.

자네는 부모에게 전혀 내색을 하지 말고

여전히 아들로서의 효성을 다하고,

또 그럴수록 공부를 열심히 하게.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결혼하여

자네는 절대로 태아일지라도 소중한

자식의 생명을 끊는 아버지가 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참으로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어 주게.

그게 자네를 위해서나 이 사회를 위해서나,

우리 모두를 위해서 참된 삶의 길일세."

그 학생은

신부님의 이 간곡한 타이름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를 떠날 때에는

밝은 앞날을 반드시 창조하겠다는

마음 다짐을 굳게 하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그날의 결심 그대로

훌륭한 대학을 마치고 결혼도 하고,

귀여운 아들도 가지고,

또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기에 이르러

아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기쁨을 알리기 위하여 그 청년은

신부님을 그날 그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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