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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왜 절해유?

<초기 불교의 가르침>

<초기 불교의 가르침>

● 중광 色卽是空 空卽是色 23.5×25cm

<초기불교에 관하여>

초기 불교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해탈을 연기한다는 보살의 이상을 중심으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원시불교 전통을 지칭합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한 기원전 480년, 원로 제자 500명이 모여 가르침과 계율을 편집하는 제1차 결집結集회의를 열었습니다. 그 100년 후 다시 제2차 결집이 이루어졌고, 아쇼카왕 때에(기원전 225년) 제3차 결집을 하여 초기 불교경전의 틀이 확정되었습니다.

말씀을 수집한 경經, 계율 모음인 율律, 해설서인 논論을 합해서 삼장(三藏, Tripitaka)이라고 부릅니다.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에 이루어진 초기 불교경전의 핵을 이루는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삼보三寶'의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세 가지 보물, 즉 '삼보(Tisarana)'란 불佛, 법法, 승僧 세 가지를 말합니다. 불교의 경전이나 불교에 관한 책의 첫 장에는 항상 '삼보에 귀의합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이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자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먼저, 불교에서 사용하는 '귀의歸依한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를 자력신앙自力信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선禪불교에 와서는 자력적인 면이 강조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불교에 귀의해서 부처의 가르침에 신심을 두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먼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 그리고 번뇌를 극복하고 해탈解脫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믿음을 두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체득하기에 앞서서 우선 삼보에 믿음을 두고 귀의한 다음에 그 길을 따라 수행합니다.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자기 스스로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 수행과정에서는 신심이 매우 중시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학에서 불교의 신앙은 '잠정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이 끝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신앙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믿는 마음으로 이미 이룩한 사람들의 길을 따라 자신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보를 한 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불佛입니다. 붓다란 깨달은 사람, 곧 각자覺者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부처는 석가모니입니다. 그는 45년 동안 설법을 통해 하늘의 데바(deva, 神)와 인간들의 스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불법을 가르침으로써 제자들도 깨달음을 얻은 존자(arahant, 阿羅漢)가 되게 하여 초기 불교에 부처와 제자들을 합해 61명의 아라한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명증하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삼보의 두 번째 요소인 승僧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승가(僧伽, Sangha)란 공동체란 의미로 불교의 교단을 가리킵니다. 승가를 정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전부 포함하는데, 부처를 따르는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信男, 우바이優婆夷, 信女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구(bhikkhu)'란 원래 '걸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비구니'는 같은 뜻의 여성 명사입니다. 출가자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고, 남에게 동냥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비구의 구족계具足戒는 250계인데, 이 계를 받게 되면 정식 승려가 된 것이고 불교의 의례를 집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로 따지면 수도서약의 성격을 지니지만 기능상으로는 서품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부대중 중 세 번째는 '우바새優婆塞'인데, 재가 신도들 중에서 남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바새(upasaka)'의 원래 뜻은 '공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출가자들에게 시주를 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승가를 지원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바새의 여성 명사가 '우바이(Upasika, 優婆夷)'입니다.

이들 재가 신도들은 오계五戒를 지키는데, 불교 신자로서 누구나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율입니다. '살생하지 말라.', '남이 주지 않은 것을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에 취하지 말라.'는 다섯 가지 금지사항입니다. 이 오계에 다시 의식주의 화려함을 포기하는 다섯 계를 덧붙여서 십계를 받게 되면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가 됩니다.

'사미'와 '사미니'는 수행자로서 처음 출가 승가에 들어온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구족계를 받기 이전의 수행자들입니다. 사미 혹은 사미니는 20세가 넘어야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들을 복전福田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불자들은 사부대중을 이루어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삼보의 세 번째 요소

다음으로 삼보의 세 번째 요소가 되는 법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르마(dharma, 佛 法)', 즉 부처의 가르침은 사성제四聖啼에서 그 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성제는 석가모니 부처가 보디가야에서 깨달은 진리로서 녹야원에서 만난 다섯 제자에게 한 첫 설법이었다고 하는데. 소승이나 대승이 모두 따릅니다.

해석상의 차이는 있지만 불교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가르침이 이 사성제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 즉 네 가지 우주의 거룩한 이치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입니다.

첫번째 '고(苦, dukkha)'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세상 만사 모든 것이 다 고 [一切皆苦]'인데, 대표적으로 8가지 고를 나열합니다.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 모든 욕망으로 인해 번뇌에 불타는 것, 8가지입니다.

이같은 '고'의 이치를 초기 불교에서는 심리적인 실재로 이해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것, 계속되는 번뇌의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이 '고'의 이치는 심리적인 괴로움의 체험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세상 만사 모든 것이 '고'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사 전체가 환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더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세상사가 모두 무상無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와 함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세 가지 특성을 '삼법인三法印: 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제행무상이 가장 첫 번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돌아가는 현상은 무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常'이란 일정불변의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무상無常이라고 하면 일정불변의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불교에서 무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유명한 비유는 갈대의 예입니다. 갈대가 서로 의존해서 서 있는 것처럼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 홀로 자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무상, 곧 연기사상은 힌두교의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신격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 비교하자면 항존하는 하느님의 개체적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시작한 그 무엇, 존재의 시간적 기원이 있다는 주장 역시 배격하는 것입니다. 이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 의존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의 가장 근본적 깨달음이었고, 이것 때문에 불교는 당시 힌두교의 한 분파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 개념은 브라흐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의 기원으로서 절대 실재인 브라흐만이 존재하고, 또 브라흐만은 항존하는 원리로서 모든 사물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힌두교의 근본 전제입니다.

불교는 이같은 브라흐만의 실체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항존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도 애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물을 항존하는 실체를 지닌 실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애착을 갖고 그 애착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고통과 번뇌가 생긴다는 것이 불교의 주장입니다. 모든 만물의 참된 모습, 즉 제행무상으로서의 만물의 진상을 정확히 깨닫게 되면 인간의 고통과 번뇌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성제의 두 번째 이치는 '집集'으로서, '고'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 세상에는 집착할 만한 실체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진상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개체는 항존하는 실체가 없고 단지 '오온五蘊'의 집합체일 뿐이라고 합니다. '온蘊'이란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이 단지 다섯 개의 덩어리가 합쳐져 있는 것일 뿐, 그 안에 어떤 항존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섯 개의 덩어리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입니다. 색은 물질적 형체를 가리키며 인간에게는 육체를 말합니다. 수受는 감수작용感受作用입니다. 인간의 오감과 거기서 발생하는 정신적인 감각을 포함한 것입니다. 상은 표상작용表象作用을 말하는데, 외부에 어떤 색이 있어서 그것이 수受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와 표상화되는 표상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인식되는 것입니다.

행은 행동보다 앞서는 의지작용意志作用입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특히 이 의도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이 의도하기 때문에 행동이 따르게 되고 그 행동에서 업業이 생깁니다. 의도가 없는 행동에서는 업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행동이 죄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의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불교는 윤리적으로 상당히 발달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식識으로 이것은 천부적으로 갖고 있는 도덕 의식이 아니라 색으로부터 이어지는 감각기관에 의존해서 나오는 인식작용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오감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식(五識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과 마지막으로 심식(心識 : 觀念)을 합하여 육식六識이 있습니다. 따라서 감각이 사라지면 이 육식도 사라집니다. 이상의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가 합쳐져서 인간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것은 다 12연기緣起에 의해 존재했다 사라질 뿐입니다. 연기라는 말은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서 연기를 중심으로 하여 다른 모든 가르침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기 사상은 후에 공空으로도 설명됩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내용도 결국은 이 연기의 이치인데 불교 전통에서 12가지 고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명無明, 혹은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모든 사물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 무명 때문에 사람이 계속 집착을 하게 되고 갈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무명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냥 홀연히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악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질문에 대해 기원을 따지다 보면 정확히 대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현세적인 인간의 상태 그대로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며, 그 원인이 무명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인간의 현 상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원죄 개념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 불교의 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행行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행에는 의도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갈구하는가 하는 동기에 의해 감각적 의식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세 번째 고리인 식識입니다. 네 번째는 명색名色으로 이름과 형체를 지닌 존재가 시작되는데, 명은 정신적 현상을 지칭하고, 색은 육체적 현상을 의미합니다. 다섯 번째는 육입六入 혹은 육처六處라고 해서 여섯 가지 감각 기능을 말합니다. 여섯 번째는 촉觸으로서 대상에 대한 감각적. 정신적 접촉을 말합니다. 일곱 번째는 수受로 접촉에 의해 생기는 느낌입니다. 여덟 번째는 애愛인데, 불교에서 이 애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보통은 애착 혹은 갈애渴愛를 의미합니다. 번뇌와 직결되는 갈구渴求의 애愛입니다. 아홉 번째는 취取로서 집착입니다.

이것을 이미지로 설명할 때 보통 남녀가 서로 포옹하고 있는 것으로 표상됩니다. 남녀의 결합으로 새로운 존재가 잉태되듯이 이 집착에 의해 생성의 과정이 추진되는 열 번째 고리가 유有입니다. 열 한 번째는 생生으로서 개체의 태어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열 두 번째 고리가 노사老死입니다. 태어남이 있음으로 늙음과 죽음과 슬픔과 고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열두 과정이 고리처럼 연결되어 계속 되풀이됩니다. 이렇게 연기에 의해 계속해서 반복되는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려야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윤회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것이 사성제의 세 번째 이치인 멸滅입니다.

멸滅은 곧 열반涅槃으로, 모든 갈구와 번뇌의 불을 꺼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열반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경우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성취된 열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여(有餘, 남아 있다)라고 하는 것은 욕망과 번뇌의 불은 꺼졌고 업도 더 이상 생기지 않지만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체의 고통과 존재 자체는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경우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입적한 후 얻어진 열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완전한 평화 속에서 서쪽을 향해 누워서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이 생에서 지니고 있던 육체마저도 벗어버림으로써 완전한 평온을 누리는 열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는 [無餘]열반입니다.

사성제의 마지막 이치는 도道입니다. 고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길道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이 여덟 가지 바른 길을 다시 세 범주로 나누면 계戒, 정定, 혜慧의 세 가지입니다. 계에는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正業, 바른 행동), 정명(正命, 바른 직업)이 있습니다. 정에는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수행), 정념(正念, 올바른 마음가짐), 정정(正定, 올바른 명상=參禪)이 있습니다.

혜慧에는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해당됩니다. 정견正見은 바르게 보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만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부처가 깨달은 사성제의 이치에 따라 세상을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무상하다는 것[苦], 그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集], 그 연기를 끊을 수 있다는 것[滅], 그리고 그 길[道]이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정사正思는 바른 결심입니다. 바르게 보고 난 후 바르게 결심하여 그대로 나아가는 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얼마나 마음(의도, 결심)을 중요시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세 가지 바른 말과 행동과 직업은 도덕적인 것이고, 그 다음 바른 수행과 마음가짐과 명상은 수행적인 것이며, 마지막의 바른 견해와 결심은 정신적 통찰력입니다. 이 세 가지 도덕적, 수행적, 정신적 범주의 실천을 모두 합한 것이 팔정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당시의 관습대로 그의 장래에 관해 점을 쳤다고 합니다. 아시타(Asita)라는 예언자는 장차 그가 '전륜왕(轉輪王, Cakravartin)'이 될 것으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전륜왕이란 '바퀴를 돌리는 왕'이라는 뜻으로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상을 보면 두 손으로 바퀴를 돌리는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고, 불교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 '법륜法輪'이 된 것도 여기서 기인한 것입니다.

전통에 의하면 석가모니의 아버지는 이러한 예언을 듣고 나서 아들이 출가하여 성자가 되려고 할까 봐 매우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고통을 모르게 석가모니를 키웠다고 합니다. 왕궁에서 아쉬울 것이 없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16세 경에는 결혼을 하고 라훌라(Rahula)라는 아들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8세 때에 우연한 계기로 노인과 병자, 죽은 자의 상여를 보고 세상의 허무를 느껴 왕궁을 떠나 출가하였습니다.

6년 동안 고행생활 중 갠지스 강가의 마가다국을 중심으로 당시의 요가 수행자 6명을 방문하여 극단적인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소승국가들을 방문하면 뼈가 앙상히 드러난 '고행하는 고타마'의 불상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극단적 고행이 구원을 위한 최고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석가모니도 이 같은 극단적인 고행을 실천하여 무아경에서 황홀감을 체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같은 극단적 고행의 결과로 무아경에 들어가면 그때에는 번뇌를 잊을 수 있지만 무아경에서 벗어나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다시 허무와 번뇌로 고통받게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는 극단적 고행에서 오는 황홀경이 참된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석가모니는 독자적인 수행을 하게 됩니다. 어느 소녀가 주는 우유를 받아 마시고 기운을 차린 석가모니는 극단적인 고행도 아니고 쾌락의 길도 아닌 중도中道의 수행을 하게 됩니다.

보디가야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통해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깨달음을 얻기 전 석가모니는 마魔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석가모니 불상 중 결가부좌를 하고 오른손을 땅에 짚고 있는 것은 마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닦은 공덕을 땅에게 증거해 달라고 했다는 전승을 표현한 것입니다.

보리수 밑에서 그가 깨달은 진리가 바로 '연기緣起' 혹은 '공空'의 진리입니다. 우주 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진행과정의 참 모습이 바로 '연기', 곧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인연에 의해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애착할 만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으로 인해 모든 번뇌가 소멸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涅槃, nirvana)'입니다. 이 'nirvana'라는 단어는 본래 '꺼져 없어지다.' 라는 뜻으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져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우주 만물의 참된 실상을 깨닫고 모든 번뇌가 소멸됨으로써 평온한 열반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초기 불교 예술에는 부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보리수나 발자국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열반에 든 부처는 형태로 표현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후에 보살 개념이 유행하면서 부처도 점점 인간 모습으로 표상되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4~7주 동안 명상을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석가모니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간직할 것인가의 문제로 망설이게 됩니다. 불교 전통에 의하면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은 자들이 26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깨달음이란 결국 자기 자신이 얻어야 하는 것이지 누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역시 이같은 문제로 망설였지만, 결국 그는 자비심으로 가르침을 베풀기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이 결정이 불교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나레스 교외의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하게 되는데, 석가모니와 함께 극단적 고행을 실천하다가 석가모니가 고행을 포기하자 실망하고 떠났던 5명의 옛 동료들이 그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가르친 내용이 '사성제'의 핵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네 가지 진리의 요체라고 하는 '사성제'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제자들이 모여들고 석가모니는 생애를 마칠 때까지 45년 동안 중부 갠지스강 유역을 널리 돌면서 설법을 하였습니다. 석가모니의 설법 방법의 특징은 '방편方便'입니다. 각 사람마다 그에게 맞는 방법으로 가르침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은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면서 설법했지만, 음력 4월 16일에서 7월 15일까지 약 3개월간 우기 동안에는 안거安居를 했습니다.

마가다 국왕인 빔비사라가 죽림정사를 기증하였고 사비티의 부호인 수다타는 기원정사를 지어드려서 이런 초기 사찰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안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다닐 수도 없고, 또한 벌레들이 많이 돌아 다니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도 돌아다니는 일을 멈추고 한곳에 머물러 수행에 전념한 것입니다.

안거의 전통은 북방불교에서는 겨울 10월 16일에서 1월 15일까지에도 하게 되어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45년 동안 지속적인 설법 여행을 계속하다가 석가모니는 약 80세에 쿠시나가라에서 입적하게 됩니다. 입적하기 전 그의 사촌이자 수행 제자였던 아난다와 다른 비구들에게 남긴 마지막 설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니 그침없이 노력하라. 불법(dharma, 法)이 너의 스승으로 남아 있으리라." 따라서 소승불교에서 보는 불교의 핵심은 '각자가 스스로 노력하는 것', 그리고 '부처가 가르치신 불법만이 인도자'라는 자력적 신앙 형태입니다.

그러나 부처가 입적할 때 서쪽을 향해 누웠다는 전승은 후에 타력적 신앙 형태인 정토종의 서방정토 사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석가모니의 생애가 지속적으로 영감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예들입니다.

석가모니가 입적한 후 그의 장례식은 자신의 유언대로 재가 신도들의 손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다비 후 남은 사리(舍利, 본래 사리란 특별한 구슬 같은 것만이 아니라 화장 후 남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를 서로 나누어서 탑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출가한 제자들이 계율과 말씀을 수집하여 경전을 만들었다면, 재가 신도들은 법륜왕의 유해를 모신 탑(stupa)을 세우고 그 탑 전면에 부처의 전생설화(前生說話, Jataka)를 조각했습니다.

특히 불교를 국가 종교로 신봉한 아쇼카왕(Asoka, 기원전 265-232) 때에는 8,400개의 탑이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이 탑을 중심으로 불교는 대중 신앙으로 발전했습니다. 부처가 되기 전 보살로서 석가모니가 이룬 윤리적 공덕들은 재가 신도들이 살아야 할 행동지침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보루였습니다.

※ 사진 : 분당불자회 http://members.tripod.lycos.co.kr/buljanet/

김승혜(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