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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1.1-4. 요한20.2-8)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20,1-10).”

 

1) 우리는 성탄절 다음 날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을

지내면서 ‘박해와 순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다시 그 다음 날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면서

베들레헴 아기들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기들이 이쪽 세상에서는 정말로 억울하게

죽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탄절 뒤로 복음 말씀을 이렇게 배치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은 아닐 것이고,

축일들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성탄은 십자가의 시작’이고,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이고,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2) 각 개인의 신앙 여정도 같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십자가의 길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고, 부활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미리

누리면서,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십자가를 너무 고통의 상징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훈련을 반복하는 것과

같은 일, 학생들이 중요한 시험의 합격을 위해서 꾸준히

공부를 하는 것과 같은 일로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 얻게 될 영광과 생명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6-7).”

 

3) 사도 요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복음서를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에 기록한 증언들과 고백들을 통해서

우리를 그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사도입니다.

4) 사도 요한은 첫째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는데, 이 고백도 결코 간과하면 안 되는

중요한 업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5)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고백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라는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이 고백과 증언을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다.”가 됩니다.

마음속에 사랑은 없고 이기심과 미움만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에서 누가 옳고 누구 그른지,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지는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기준으로 해서 금방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무리들이

하느님 편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선도

정의도 평화도 볼 수 없습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